brunch

매거진 경험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na Jun 15. 2016

보통날에 보통씨를 두 번 만나는 일

알랭드 보통 강연 - The Course of Love

내 방을 침범한 햇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며 아침밥을 먹은 후 회사에 출근해서 적당히 자극받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가 너무 늦지 않게 퇴근을 했다. 다이어트를 하려고 또 마음먹었지만, 결국 떡볶이와 순대에 무너져버린 오늘은 평범한 보통날, 그리고 두 번째로 알랭드 보통씨를 만난 날이다.


신작 'The course of love'  발간 기념으로 쿠퍼 유니언에서 진행된 강연이었는데, 오늘 만난 보통씨는 여전히 멋지고, 세련되고, 재치 있었다. 전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Essays in Love)'가 사랑이 시작하고 또 식어가는 감정의 주기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후속작으로 그렇게 성숙된 사랑을 잘 가꾸고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을 쌓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와 선셋을 지난 미드나잇 같은 소설이랄까. 강연이 끝난 후에는 Q&A 세션이 이어졌는데, 어떤 질문에도 애정남이랑 맞먹는 재미와 명쾌함으로 우문현답을 해내는 모습을 보니 역시 알랭드 보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Open relationship'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Q) 캐주얼하게 만나는 썸 타는 관계(Open relationship)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사람은 모두 '안정'과 '모험'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문제이다. 안타깝지만 둘 다 선택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어떤 선택을 해도 불행할 테니(ㅋㅋ) 어떻게 불행할지는 자기 선택이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질투'는 자본주의나, 역사의 산물 따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문어발 같은 관계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것.


계획에 없다가 친구 덕분에 우연히 가게 된 강연이었는데,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보통씨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평범하게 치열했던 하루가 알고 보니 참 소중한 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미국에 온 지 56번째 되는 날이었던 그 날, 우연히 들른 로워 이스트의 카페가 너무 예뻐서 인테리어를 노트에 끄적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경험 일기' 프로젝트를 미국에서도 계속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오늘 친구랑 마이크로소프트가 링크드인을 인수한 이야기를 하다가, 야후가 과대평가된 가치로 텀블러를 샀던 대화를 했는데, 2년 전 이날은 자료 백업이 안 되는 텀블러를 그만두고 티스토리로 옮겨왔던 날이었다. 이 때 들고나갔던 JOH 의 컨버스백은 쓸수록 매력 있는 여전히 나의 애정 하는 아이템이다. 그 당시에는 의미를 다 알 수 없이 채워졌던 하루가 오늘의 많은 부분과 닿아있다. 기록해 두길 참 잘했다.


처음은 신선하고 강렬하다. 그 후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시간을 쌓아나간다는 건 꽤 많은 노력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하지만 열매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선물 받은 서양난을 보살피고 있는데,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 주고, 온도를 맞춰주는 과정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꽃이 피어 있고 (어쩌면 더 많은 꽃이 죽기 때문에) 그때 느끼는 행복과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평범하게 쌓아가고 있는 요즘의 날들이 시간이 흐른 후에는 또 어떤 의미를 이어 나가게 될까. 만약 또 한번 보통씨를 만나게 된다면, 삶의 중요한 것들을 꾸준하고 충실하게 쌓아온 그런 모습이면 족하지 싶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오늘 강연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을 의역해서 기록해 본다. 모든 말 뒤에 'ㅋㅋㅋ'를 붙이면 보통씨의 강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되게 재밌는 아저씨다.


결혼은 자발적 구속이다. 도망가지 못한다는 전제가 사람을 얼마나 성숙시키는지 결혼을 통해 알게 된다.
소설은 Life simulator이다. 우리는 소설을 보며 인생을 공부한다.
연인 사이에서는 숨기는 거 없이 솔직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과연 정말 그럴까? 사랑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못할 이야기가 없고, 또 이렇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런 과정을 거쳐 애정이 쌓이고, 소중한 관계가 되면 아이러니하게 이제부터는 할 수 없는 본능적인 이야기들이 생긴다. 여자친구 앞에서 "저 여자 죽이네.."라고 했다가는 뒷수숩하느라 고생 좀 할 거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있다. 사랑 = 100% 진실은 아니다.
로맨티시스트들은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공부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사랑은 학습하고 배워야 더 잘할 수 있는 거다. (작가의 사랑의 기초라는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과 연관된다)
성숙한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4살 이하 아가처럼 대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 이해해줄 수 있고 못하는 게 당연하다. 오구오구
완벽한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못난 죄인 두 사람이 만나는 건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나.
요즘 실리콘 밸리는 핫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것을 잘 가꾸고 오랜 시간 키워나가는 문화는 아니다. 성숙해지는 과정에는 또 다른 손길과 노력이 이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STORY에 대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