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입원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불쑥 나에게 누군가를 소개해 주고 싶는 얘기를 꺼냈다.
나는 그때 머릿속에 엄마를 간호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당황스럽고 무척이나 내키지 않았다. 누가 아픈 엄마를 두고 속 편하게 소개팅이나 하며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겠는가?
게다가 나는 직장 발령을 앞두고 있었는데, 지방으로 발령이 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지인이라도 새롭게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엄마도 내게 진지하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몇 번을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어느 날 이모도 있는 자리에서 엄마가 내게 다시금 진지하게 말했다. 직장 다닐 때 팀원이었는데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사귀지 않더라도 꼭 한번 만나만 보라고.
말릴 줄 알았던 이모도 합세해 내게 이럴 때일수록 병원에만 있으면 기분이 더 우울해지니, 기분전환을 할 겸 만나보라고 그 시간에는 이모가 병원에서 엄마를 보고 있겠노라고 말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뜻밖의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엄마의 병원에 그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큰 키에 하얀 얼굴, 넓은 어깨를 가진 호남형의 남자였다.
점심시간에 찾아온 그는 처음에는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가 엄마에게 점심을 먹여주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돌아갔다.
두 번째 만남은 병원의 지하 1층에 있는 식당가였다.
나는 그때 그와 잘 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저 저녁이나 먹고 적당히 얘기나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기대 없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
서로 별다른 느낌 없이 끝날 것만 같았던 두 번째 만남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상사로서 엄마를 이미 알고 있던 그에게 엄마의 상태에 대해 따로 설명을 해야 하는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는 내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편했다.
자리가 끝나갈 때쯤 나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대해 호감이 생겼고 다행히 그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우리가 연인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데이트하는 데에 긴 시간을 쓸 수 없었던 나를 배려해, 그는 주로 퇴근 이후나 주말에 1~2시간 정도 짬을 내 엄마가 입원해 있을 때는 병원 근처에서, 퇴원을 하고 집에 있을 때엔 우리 동네 근처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의 존재는 내게 생각보다 더 큰 힘이 되어주었다. 엄마의 병간호를 할 때에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곤 했던 기분이 그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사라지고 꿈을 꾸듯 들뜬 감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때만큼은 아픈 엄마도, 그런 엄마를 병간호해야 하는 나도 없었고, 사랑에 빠진 스물다섯 살의 청춘만 남았다.
그러다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올때면 마치 자정을 넘긴 신데렐라처럼 모든 게 사라지고 다시 우울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와의 만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그 시기 나는 외롭고, 불안하고, 연약해서 그야말로 감정적 무방비 상태였다는 것을.
그래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다정한 성격만큼이나 세심하게 내 감정을 보듬어 주었던 그에게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그가 내게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진지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이 으레 그러듯 연애 초반 도파민이 폭발할 시기에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장난으로 치부했을 만큼 가벼운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부풀어 올랐다.
끝도 없이 긴 캄캄한 터널 속을 걷고 있던 나에게 저 멀리서 한줄기 구원의 빛이 반짝인 것이다.
나는 급기야 그가 내 운명의 상대라고 멋대로 믿어버렸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불쑥 아빠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깊이 생각하든 아니든 나와의 결혼을 생각하던 그였기에 이 질문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너무도 당황해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눈치가 빠른 나는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안환경은 우리 집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그와 만난 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했고, 외할머니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압구정에 있는 유명한 아파트에 살았다. 그의 집은 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경기도 어느 부촌에 있었고 강남 3구에도 아파트 한 채가 있었다.
나의 아빠는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취업을 했지만, 그가 원하는 직업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미래의 장인어른이 어느 기업의 임원이거나 아니면 공무원이거나 어찌 되었든 안정적인 화이트칼라의 직업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내가 어버버 하자 그는 자신이 급했다며 차차 알아가자고 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웃었지만 어쩐지 우리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빠에 대한 원망과 불꽃같은 분노가 차올랐다. 아픈 엄마의 병문안은 나 몰라라 하면서 일주일 혹은 이주일에 한 번씩 얼굴만 비추고 사라지는 것도 그랬고, 엄마의 병원비나 생활비도 지원해주지 않아 엄마의 퇴직금과 보험금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것도 그랬다. 하지만 아픈 엄마를 두고 큰소리를 내고 싶지 않았고 엄마도 오히려 아빠가 오면 불편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에 구태여 집안을 들쑤셔서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더 주고 싶지 않아서 이제껏 참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 때문에 내가 '운명이라고 믿은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해서 쏘아댔다. 아빠가 성실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자마자 지금 우리 집이 이런 꼴이 났고, 내 인생이 망하게 된다면 그건 아빠 탓이라고.
아빠는 한동안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었다.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자 크나큰 후회가 밀려왔다. 화를 주체할 수 없을 때면 상대방의 가장 아픈 부분만을 골라서 후벼 파는 말을 해버리는 나의 못된 천성이 또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30분쯤 지났을까. 아빠에게 한통의 문자가 왔다. "아빠의 직업 때문에 결혼을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너와 인연이 아닌 것이다. 잘 생각해 봐라."
나는 문자에 답장하지 않았다. 아빠가 당당하지 못하니 변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아니었더라도 그와 나의 관계는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꿈꿨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아서. 실체 없는 희망을 붙잡고 겨우 견디어 왔던 내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 원망의 화살을 아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고 나는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는 내가 발령을 받자마자 조바심을 내며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확답을 줄 수 없지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는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발령을 받고 처음 한 두 달까지는 주말마다 엄마를 보러 서울을 올라갈 때마다 만나던 그가 어느 순간 주말에 아빠와 골프를 배운다며 혹은 운전연습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만남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그와의 헤어짐을 직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아무리 헤어짐을 연습했어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자 상실감이 너무도 커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헤어지자는 그의 통보는 만남도 아닌 전화 한 통이었다.
울면서 그를 붙잡는 내게, 눈물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내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 살 가망은 없어? 그것만 말해줘."
"오빠한테는 그게 중요한 거야?"
"너희 아버지 직업은 그렇다쳐도,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결혼을 했는데 장모님이 없으면 좀 그렇지 않냐고 하더라고..."
그 순간 흐르던 눈물이 뚝하고 멎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췄고 내 마음은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아빠가 맞았다. 난 그가 원하는 연인이 아니었다.
난 그에게 무엇을 바랐던 걸까. 나의 특수한 상황이 그에게 자격을 부여했을 뿐, 그는 나의 구원자도 아니고 왕자님도 아니었다.
그를 아주 오랜 시간 원망하며 한동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나의 외모와 직업을 보고 호감을 가진, 적당히 계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인 평범한 30대의 남자였을 뿐. 오히려 그런 그에게 과도한 역할을 부여하며 소망을 투영한 내 잘못이 크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그를 정말 사랑하기는 했었을까?
그를 생각할때면 늘 엄마와 함께 떠올라서 막상 그의 성격은 어땠는지, 그가 뭘 좋아했는지. 우리 둘만의 추억은 뭐가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땐 그가 내 일생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냥 그 시기에 그와의 인연이 닿았을 뿐, 어쩌면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다가왔어도, 그게 누구든 나는 아마 그 사람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기댈 수 있는 누구라도 간절히 필요했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