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집을 기억한다.
본가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이차선 도로의 한적한 시골길로 들어서면 마을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이 보이고, 닭 집과 미용실 사이에 있는 바로 그 골목으로 들어가 헐거운 나무 울타리 사이로 왕왕 짖는 사냥개 두 마리를 지나면 멀리서 보이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교회,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은색 대문의 마당 딸린 작은 집. 그 아담한 기역자 모양의 집이 내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는 외할머니의 집이다.
마당 한가운데는 봄이면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목련나무와, 슬슬 더워지는 5월에 검붉은 색으로 만개하는 장미가 있었고 여름이면 달큼한 냄새를 풍기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반가운 손님이 오면 꼬리를 흔들며 힘차게 짖어대던 순하고도 영특한 풍산개 한 마리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전후시절을 거친 여인들이 대개 그렇듯 외할머니는 강한 여성이었는데, 막걸리 주조장을 다니던 나의 외할아버지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녀는 아들 셋에 딸 둘, 도합 다섯을 홀몸으로 키워냈다.
젊은 시절 남편 없이 여자 혼자서 고된 농사일과 육아에 온갖 고초를 겪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여 독립하자 농사일도 그만두고 텃밭이나 일구며 육신의 평안을 찾으려 했던 외할머니는 직장을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딸 때문에 허리가 쑤시고 등이 배기는 노년이 되어서 다시 육아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평일에는 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남매의 어린이집 등하원부터 요리, 설거지까지 도맡아서 했는데, 적지 않은 나이에 가사노동과 육아까지 하면서 사위와도 집 안에서 부대껴야 했으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위는 집안일을 돕거나 아이를 돌보는 일 보다 자기 몸 챙기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베짱이 같이 팔자 좋은 소리를 하는 그를 볼 때마다 입 밖으로 불만이 새어 나오려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안쓰러운 딸자식 때문에 이게 다 팔자려니.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떤 이유로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서 약 2년간 눌러앉게 되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우리 아빠와 너희 할머니가 아는 사이야'라고 처음 말을 건넨 친구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고, 전교생이 100여 명이 겨우 넘을까 말까 한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학교 생활을 보냈다.
집에 와서는 늘 가방을 내던지고 마루에 반쯤 누워 친구와 함께 숙제를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쏘다니면서 밤늦게까지 놀다가 외할머니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마당에서 벌레를 구경하고 땅따먹기나 하는 행복한 일상이 언제고 반복될 줄 알았지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집을 떠나 전주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전학을 가는 나를 위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의 보물 1호 다이어리를 이별 선물이라고 내게 건네준 순박했던 친구들의 손을 잡고 나도 같이 울음을 터트렸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든 이 동네와 작별할 수 있었다.
도시의 아이들은 학년이 끝나갈 무렵에 시골에서 전학 온 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다. 김제에서 받은 환대까지는 아니어도 친구 한 두 명쯤 생길 거라고 기대했던 나는 처음 느껴보는 홀대에 한없이 의기소침해져 그 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동안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떼를 쓰면 엄마는 마지못해 주말에 나를 외할머니집에 내려다 놓곤 했었는데, 평소에는 단출하게 먹다가도 반가운 손녀가 왔다고 이것저것 차려낸 상에는 직접 담근 된장으로 만든 된장국과 바싹 익힌 계란프라이, 그리고 고구마줄기 된장 지짐이 올랐다. 소박하지만 맛이 좋았던 외할머니의 밥상은 이젠 다시 맛볼 수 없지만, 마치 향수병처럼 지금도 가끔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외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잠이 들고, 느지막이 일어난 일요일 아침, 외할머니는 온데간데없고 고요한 적막감에 슬리퍼를 신고 그녀를 찾으러 다니면 늘 당신 집 뒤에 있던 텃밭에서 상추며 감자를 캐면서 내게 발이 더러워지니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그녀의 병간호에 온 가족이 그렇게 정신을 쏟지 않았다면 외할머니가 그토록 사랑했던 딸과 손자, 손녀는 틀림없이 당신이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했을 것이고 그 앞에서 이제까지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다 같이 슬픔을 공유했을 것이다.
상이 끝나고 다시 엄마의 병실로 돌아온 나는 우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말없이 엄마의 옆에 누워 괜히 그녀의 냄새를 맡았는데, 새삼 엄마의 냄새와 외할머니 품에서 나는 냄새가 같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흐려지는 동공을 보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딸이 눈에 밟혀도 너무 일찍 데려가지 마. 할머니.'
외할머니가 떠나고 나서 형제들 간 한바탕 다툼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모질지 못한 그들은 금세 화해했고, 그녀 생전에 매년 몇 번씩이나 며느리들이 내려와서 손수 챙겼던 제사는 없애기로 합의했다. 그녀가 남긴 유산은 형제자매들에게 분배되었고 외할머니의 집은 그녀의 넷째이자 둘째 딸이었던 이모에게 상속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외할머니의 집과 마을도 변화가 있었는데, 오랜 시간 그녀 집의 눈과 비 등을 막아주었던 슬레이트 지붕에 문제가 생겨 석면 지붕은 철거하고 대신 파란색 컬러 강판 지붕으로 교체했고, 더 이상 마당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마당의 나무들을 잘라 한때는 울창했던 나무들은 밑동만 남게 되었다. 이제는 늙어버린 풍산개는 개를 키우는 다른 친척 집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외할머니가 죽고 나서 5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녀의 앞집, 옆집, 뒷집에 살던 할머니들이 차례로 모두 죽었다. 마을은 조금 더 쓸쓸해졌고 빈 집이 조금 더 늘어났다.
내가 그토록 빌었음에도, 2016년 그 해에 나는 겹상을 치르게 되었다. 엄마는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외할머니가 떠나고 6개월이 채 지나지도 않은 12월 마지막 주,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의 입관식 때 그저 깊은 잠에 든 것처럼 평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당신의 어머니와 어찌나 닮았던지.
불현듯 한 일화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는 우리 남매와 외할머니를 데리고 중국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베이징의 자금성과 연길에서 백두산을 보는 게 주요 코스였는데, 정신없이 돌아가는 패키지여행에서 어린 나와 오빠는 일찌감치 지쳐 서로 투닥대면서 엄마에게 징징댔다. 잠시 둘러보는 시간에 엄마는 말없이 걸었고, 외할머니는 지쳤는지 근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내가 엄마에게 짜증 내는 모습을 한참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가. 너무 짜증 내지 말아라. 내 딸 힘들어."
여행 내내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던 그녀가 내게 조심스레 건넨 한마디였다.
그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진심으로 다가왔던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녀는 눈을 감을 때까지 내내 자신의 딸이 눈에 밟힌 걸까.
못 미더운 사위와 철없는 손자 손녀가 자신의 딸을 힘들게 할까 봐 혼자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까.
지금 외할머니와 엄마는 함께 있을까.
생에 못다한 정을 맘껏 나누고 있을까. 그렇다면 부디,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