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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사는 집은 안 나가요

by 세피아리

수술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엄마는 퇴원을 했다. 우리는 거동이 불편한 엄마가 최대한 대학병원에 오래 머무르며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는 엄마가 응급환자도 아니고 항암치료는 외래진료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니 입원을 지속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밀려드는 환자에 비해 병상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엄마는 퇴원 수속을 밟았고, 나와 함께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첫 항암을 마치고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며 힘들어했던 엄마는 집에 오고 나서 더 이상 토하지 않았다. 답답했던 병원을 떠나 집으로 오게 되어 엄마의 컨디션이 나아진 것도 있었지만 항암을 마치고 반드시 병을 완치하고야 말겠다는 엄마의 굳은 의지도 그녀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가끔 엄마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항암으로 흉하게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프랑스 여자처럼 멋들어진 실크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빨래를 말리러 가기 위해 빌라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한발 한발 올랐다.

나는 균형을 잡는 게 어려운 엄마가 행여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넘어질까 빨래 바구니를 들고 엄마의 뒤를 따랐다.


엄마 머리에 둘러진 실크 스카프는 내리쬐는 햇볕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고, 엄마는 빨래통에 있는 빨래를 집어 들고 팽팽한 빨랫줄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널던 그 한 장면이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모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의 간병을 위해 요리에 서툰 나를 대신해 엄마를 위한 밥과 반찬을 해서 우리 집에 가져다 날랐다. 엄마의 투병이 길어지자 이모는 내게 조심스럽게 간병인을 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모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 손에 자신의 언니를 맡기는 것이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취업 준비 중인 오빠는 여건상 서울에 자주 올라올 수 없었고 이 시기에 공교롭게도 취업해 버린 아빠 역시 엄마의 간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 스스로는 엄마의 간병은 당연히 내가 도맡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힘이 드는 줄도 몰랐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저작기능이 급격히 저하된 엄마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를 씻기고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과, 엄마의 항암 치료를 위해 엄마를 부축해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를 다니는 정신없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어느 날 문득 힘이 든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그 앞에서 힘들다는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비실대던 내 체력이 아니었다. 엄마가 잠들고 나면 혼자 남겨진 나의 고독감과 끝도 없는 심연에서 나를 허우적거리게 만든 우울감이 내 정신을 조금씩 좀먹게 했다.


언제 한 번은 서울에서 면접이 있어 며칠 집에 와있던 오빠와 크게 다투었다. 취업 준비와 엄마의 간병에 각각 예민해져 있던 우리 남매는 고성을 지르며 싸웠고, 나와 오빠를 말리기 위해 아픈 몸을 겨우 일으켜 나온 엄마는 어눌한 말투로 우리를 말리다가 답답한 듯 결국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예전처럼 우리를 중재하며 서로의 잘잘못을 꾸짖고 싶었을 것이다.

"한심한 놈들, 네 엄마가 이렇게 투병 중인데, 그 와중에도 싸우고 싶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복자처럼 엄마의 뇌를 야금야금 잠식해 나가던 종양은 그녀의 언어능력을 크게 쇠퇴시켰고 겨우 한 글자 한 글자 떼면서 느리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남매의 싸움에 극도의 흥분상태가 되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웅얼거림으로 우리에게 손짓을 하면서 울부짖었다.


엄마가 낸 큰소리에 뒤를 돌았을 때,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 아래로 야위어 버린 몸과, 항암으로 듬성듬성해진 머리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내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뿔싸, 나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를 두고 나는 어떤 끔찍한 짓을 해버렸는가.


결국 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낮 시간 동안 가정에 방문하는 간병인을 구했다. 지쳐가는 나의 모습을 엄마 앞에서 고스란히 내보일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 내가 더 힘을 내서 엄마를 직접 돌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엄마는 간병인의 부축을 받아 집 안에서 걷기를 하거나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굽혔다 하는 운동을 했다. 나는 이 시간에 주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거나, 잠을 잤다. 깨어나면 이 악몽이 끝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얼마 안 있어 엄마는 내게 위층에 사는 집주인을 만나 부동산에 이 집을 내놓아 달라는 말을 전달하라고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자 수입도 없고, 더 이상 서울에 살 이유가 없었기에 불필요한 월세가 나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엄마는 항암이 끝나는 대로 전주에 내려가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집을 내놓은 직후 몇 번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부를 하는 수험생들이 혈혈단신 혼자 와서 보고 가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엄마를 대동하고 오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함께 온 부동산 공인중개사인지 실장인지 모를 어떤 사람은 엄마보다 한 두 살 정도 많은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넉살 좋게 웃는 얼굴로 집안에 들어와서는 호기심 어린 노골적인 시선으로 엄마가 두른 스카프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뒤로 몇 번 집에 들락날락하면서 나와 약간 말을 텄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은 느리게 신발을 신는 척하며 손님을 먼저 내보내고 내게 엄마가 어디 아프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나는 웃으며 대답을 피했지만 그녀는 알겠다는 듯 '아'하고 짧게 탄식하며 싱긋 웃으며 돌아갔다. 그 후로 이상하게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이 즈음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그녀에게 처방된 스테로이드 약 때문이었다. 병원에서는 부작용이 많은 스테로이드 약을 언제까지고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점차 그 양을 줄여서 처방해 주었다. 스테로이드 약이 점점 줄어들면서 엄마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병원에서 갓 퇴원을 했을 때는 스스로 걷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기까지 했던 엄마가 약을 줄이자마자 밥도 잘 씹지 못했고, 약을 아예 끊은 날에는 내가 "엄마" 하고 불러도 대답 없이 그저 눈만 꿈벅꿈벅하며 동공이 풀린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구급차에 실려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게 된 엄마는 끝내 서울 집으로도, 그녀의 손길이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전주의 본가로도 영원히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엄마가 다시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는 아픈 엄마에게 집중하느라 잠시 집을 잊었고, 오히려 당장 그 집에 세입자가 구해지면 우리가 갈 데가 없으니 이대로 새로운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와 같이 병원에 있던 어느 날,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집주인은 엄마를 모시고 사는 40대 초반의 젊은 여자로 늘 웃는 얼굴에 세입자인 우리에게 항상 친절했던 사람이었는데 엄마가 아프자마자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며 본인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병문안을 와서 한참을 위로하다 가던 그런 분이었다.


내가 "여보세요"를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상기된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느껴졌다.

"요새 집을 보러 오는 손님이 하나도 없길래 부동산에 한번 가봤더니, 거기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그녀가 잔뜩 흥분한 채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분 암 환자 맞죠? 다른 병도 아니고, 암 환자가 사는 집, 그런 집은 안 나가요라고 하더라고요."

"네?... 정말로요?"

나는 탁하고 맥이 풀렸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 들어올 때 내게 보여주었던 그 넉살 좋은 웃음은 사실 입 속에 숨긴 자신의 무기를 숨기려는 위장이었을 뿐, 내게 호의나 친절을 베풀려고 한 행동이 전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리고 순진했던 나는 인간이 얼마나 연기에 능한지, 친절을 위장해 남에게 얼마나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간과하고 있었다.

"화낼 필요도 없어요. 그럴 가치도 없으니, 그 부동산에는 집 안 내놓겠다고 하고 나와버렸으니까요. “

내가 되묻기만 하고 한동안 말이 없자, 집주인은 황급히 덧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불시에 급소를 찔린 나머지 나는 받아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바보같이 감사하다는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도 암을 선택한 적 없었다. 암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데,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이것도 암환자가 감수해야 할 것들 중 하나인 것인가? 무척이나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그 얘기를 직접 듣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만, 나는 한동안 그날의 전화 통화가 몇 번이고 계속 생각났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내가 지방 발령을 받아 이사를 나가고 엄마도 요양병원으로 옮겼을 때, 집주인의 노력에 힘입어 타이밍 좋게 그 집은 다른 세입자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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