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몇 번씩 방송 스피커에서 긴급상황을 알리는 코드블루가 울려 퍼지는 대학병원에서도 엄마가 입원해 있던 신경외과 병동의 일반 병실은 각각의 사정이 어떠하든 겉으로 볼 때는 평화로운 듯 보였다.
하루종일 침대와 병원 안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환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무료함을 이기려고 노력을 했는데, 병원 내부를 이리저리 산책하거나 면회 온 지인들과 오랜 시간을 떠들거나 그도 아니면 커튼을 치고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자신만의 공간을 즐기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가 지겨워지면 문득 눈을 돌려 다른 침대 환자들에게 호기심 어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병명은 무엇인지,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누구인지 열심히 관찰하거나 더 나아가 환자나 보호자와 어느 정도 말을 트고 나면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엄마가 컨디션이 나빠져 가까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병문안을 거절하기 전, 엄마의 지인 누군가가 병문안을 오면서 음료를 사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엄마의 지시대로 병실에 음료를 한 개씩 돌리고 있을 때, 맞은편 침대에 앉아있던 허리에 복대를 찬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음료수를 건네는 나를 향해 고맙다며 웃어 보이고서 대뜸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딸? 계속 엄마 옆에 있는 거예요? 어이구 착하네. 근데.. 참 아빠는 왔었어요?"
"아, 네. 저번에 왔었는데 아빠는 지금 일을 해서 바빠서요. 자주 못 와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내게 물은 것이었지만 나는 그 상황이 불편했다.
남들 눈에도 우리가 이상해보이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쪽을 흘끗 돌아보았지만 엄마는 못 들은 척 누워서 창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술 전, 엄마는 내게 아빠가 차라리 안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빠가 오면 오히려 환자인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아빠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제까지 내가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나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아빠는 나의 아킬레스건이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1년에 한 번씩이었던가. 가정환경조사를 했었다. 얇은 재생용지에 가정환경에 대해 묻는 질문이 빼곡히 들어찬 설문조사서를 나누어주고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었는데, 비교적 답하기 쉬운 질문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숙제를 하듯 막힘없이 적어내려 갔다.
그러다 내 손이 멈칫한 곳은 부모님의 직업란이었다.
나는 엄마의 회사는 알고 있었지만,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몰랐던 것이다.
아빠가 아침에 정장을 빼입고 나가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정기적이지 않았고 출근 시간도 들쑥날쑥했으며, 심지어 퇴근시간도 정확하지 않았다.
오전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 아빠가 식탁에서 점심을 먹거나 안방 침대에 누워 자는 모습을 자주 봤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나, 주변 친구들의 아빠가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는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나는 도무지 아빠의 직업을 추측하기가 어려워 아빠에게 직접 물어봤었는데, 그때마다 아빠의 말이 계속 뒤바뀌어서 어느 해엔 '샐러리맨'이 그다음 해엔 '자영업자'가 그다음 해에는 '사업가'가 되어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 중학생인가 고등학생 때 아빠 차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느 신문의 구인구직란 여러 군데에 검은색 잉크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것을 본 이후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스스로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엄마와 같은 해에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빠는 남아선호사상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이 귀한 시대에 아들이었고, 장남이었으니 말이다.
부모를 비롯해 온 친척 어른들의 편애를 받고 자란 아빠는 원하는 것을 노력 없이 얻을 수 있었고, 무엇이든 쉽게 얻었기 때문에 포기도 쉬웠다. 자신을 위한 주변의 희생도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아빠의 가치관과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의 결혼 후에 어차피 길게 할 생각도 없어, 미련 없이 사업을 접고 전주로 내려온 아빠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엄마에게 기대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자신이 원할 때만 직장을 다녔다. 생활력이 강한 아내가 있었기에, 그는 어린 자식이 있어도 단 한 번도 생계를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죄책감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무료한 일상의 시간들을 자신의 넘치는 몽상가적 기질을 가감 없이 발휘하면서 보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보겠다고 시를 쓰거나 때로는 붓글씨를 쓰겠다며 베란다에 화선지와 먹이 잔뜩 묻은 붓을 늘어놓아 퇴근한 엄마를 한숨짓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아빠에게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일상의 모든 것을 멈추고 '죽다 살아난 불쌍한 나 자신'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방학 때마다 본가에 내려간 내가 아빠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하면 아빠는 벌컥 화를 내며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마치 전장에 나가 싸운 장수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듯 옷을 풀어헤치며 가슴의 상처를 보여주곤 했다.
회사에 장기휴가를 내고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그를 계속 간호한 엄마의 희생과 고생은 그에게는 당연히 안중에도 없었다. 수술비의 출처가 어딘지도 그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위한 이 정도의 희생은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빠의 이런 나르시시즘을 알고 있었기에 엄마가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을 때, 그의 간병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엄마가 아픈 바로 이 시점에 갑자기 덜컥 취직을 해버린 것이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말이다.
아빠는 일을 핑계로 간병은커녕 1-2주에 한번 이방인처럼 얼굴만 슬쩍 비추곤 했고, 그마저도 어색한지 몇 시간을 채 앉아있지 못하고 떠났다. 그럼에도 병원에 들를 때면 항상 나 아니면 오빠나 이모에게 자신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문자로 꼭 알렸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과 함께.
아빠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깨끗한 병실에 가만히 앉아서 엄마의 손을 몇 번 잡아주는 그런 것이고, 휠체어를 몇 번 끌어주는 그런 것이었으며, 정돈된 추모공원에서 엄마의 유골함이 놓인 칸을 찾아 꽃다발을 내려놓고 아주 많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만지고 애도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지, 엄마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더러운 기저귀를 치우고 목욕을 시키며, 엄마의 기일을 찾아 제사상을 차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아니었다.
엄마가 떠난 후, 마치 보호자처럼 심적으로나 물적으로 엄마에게 기대고 있었던 그는 거대한 상실감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그땐 나도, 오빠도 해일같이 밀려오는 각자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아빠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가 우울증을 앓았던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아빠는 엄마가 떠나자마자 간병을 피하기 위해 방패 삼아하던 일을 곧바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가족 중 누구보다도 자주 엄마의 추모공원을 찾아 엄마의 유골함 앞에 꽃을 놓아두고, 엄마의 평안을 기도한다. 본가에는 엄마의 위패를 모셔두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두었다.
나는 평생 아빠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이제 그를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한 가지만은 확신한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사랑했고 그리고 애도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