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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피아리 Nov 22. 2024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그녀의 종착지

"살면 살수록 생명은 사라져 가는 삶. 그래, 나는 산에 올라가고 있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던 거야. 그래, 그랬었던 거야. 분명 사람들 눈에 나는 올라가고 있었어. 하지만 정확하게 그만큼씩 삶은 내 발아래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中> -


1958년생, 그 유명한 58년생 개띠로 베이비 붐 세대에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엄마는 그때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 호적 나이는 그보다 한 살 어린 1959년생이었다.


스무 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청 계약직으로 시작한 그녀의 직장 생활은 한 번의 이직을 거친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공백 없이 5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아빠를 만나 자신의 직장이 있는 전주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엄마는, 몇 년간 주말부부를 하다 아빠가 사업을 접고 전주로 내려오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당신이 눈 감는 날까지 쭉 살았다. 아빠는 아직도 가족 모임이 있을 때면 엄마 때문에 자신이 사업을 접게 된 이야기, 연년생인 오빠와 나를 한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다니던 이야기, 그리고 우리를 키우느라 자신이 했던 희생을 술안주처럼 회상하며 곱씹곤 한다.


맞벌이로 항상 바빴던 엄마와, 아빠를 대신해 나와 오빠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첫 기억도 외할머니와 함께였다. 내가 유치원을 들어가기도 전인 아주 어린 시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유치원 하원시간에 맞추어 오빠를 데리러 가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골목길이 내 머릿속에 빛바랜 사진처럼 각인되어 있다.


30여 년 간 한 직장에서 일했던 엄마는 서울에 본사를 둔 회사를 다녔지만, 그중 대부분은 전주에 있는 지사에서 근무했다. 사원에서 대리로 그리고 과장에서 부장으로 말이다. 엄마는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실직의 위험에서 무사히 일자리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주말이면 본인 집으로 내려가는 외할머니 때문에, 주말에는 혼자 오롯이 야생원숭이 같던 오빠와 나를 돌봐야 했던 엄마는 바쁠 때면 가끔 우리를 데리고 출근을 했다.

미술도구와 표구를 팔던 화랑들이 즐비해 있던 고미술거리를 지나 한참을 더 가다 보면 대학병원의 구 건물에 세 들어있던 그녀의 낡은 사무실이 나왔다.

엄마가 업무를 할 동안 오빠와 나는 빈 회의 테이블에 앉아 얌전히 종이접기를 하거나 종이에 색연필로 낙서를 했다. 그리고 점심 무렵 일을 마친 엄마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근처 단골 중국 식당으로 가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주곤 했다.

알록달록한 비즈가 달린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종업원이 언제나 같은 자리로 안내해주곤 했던 그곳.


지금은 엄마의 회사가 있던 그 건물도, 중국 식당도 모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신축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엄마가 출근을 하지 않을 때면 일요일 대부분은 엄마의 전화상담 자원봉사에 따라갔다. 응접실과 방음 부스가 딸려 있는 4~5평 남짓의 아주 작은 공간에서 엄마가 전화상담을 할 동안 오빠와 나는 응접실에서 장난을 치며 엄마가 끝날 때까지 아주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집에 돌아왔다.


그 밖에도 집에서 연주랍시고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 수준의 피아노를 치는 나를 보고 연신 감탄하며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던 엄마의 모습과, 조수석에 나를 태운채 외할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운전을 하면서 당신이 생전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였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나 ABBA의 'Dancing queen'을 흥얼거리는 모습이 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훑고 지나간다.


엄마 머리에 종양이 생겼던 그 무렵, 엄마는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사무처장'.

엄마의 길고 고달팠던 직장 생활에서, 엄마가 도달하고자 했던 당신의 영광이자 마지막 종착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다다르지 못했다. 퇴직 전 마지막일 자신의 승진을 위해 힘껏 달렸던 엄마는 결승선을 앞에 두고 힘조절에 실패해서 고꾸라진 마라토너처럼 끝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엄마가 사무처장이 되면 다시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던 전주의 지사에서는 그녀를 위해 고급스러운 자개 명판에 엄마의 새 직함과 이름을 새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그 명판이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투병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한 나와 이모가 엄마에게 조심스레 명예퇴직을 권했을 때 그녀는 병실에서 며칠 동안 고민했다. 고심 끝에 엄마는 평소에 자신의 후임자로 생각해 두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새로운 직책을 넘기겠노라고 말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어딘지 인위적이어서 오히려 내겐 서글프게 들렸다. 수화기 너머로 거듭 사양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결국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전화를 끊은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누워있다가 잠을 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그저 보호자 침대에서 엄마와 똑같이 천장을 보고 숨죽이며 누워있었을 뿐.


바로 다음날 엄마는 회사에 명예퇴직원을 제출했다. 나는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직장동료들에게 명예퇴직 서류를 전달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한사코 병실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너무도 어리고 사회생활이라고는 해보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엄마가 피곤해서 그랬겠거니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는 제 손으로 서류를 건넬 때 폭포 같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직접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버텨야만 한다는 의지와 집념으로 온갖 역경을 견디며 반 평생 헌신해 왔던 회사를 도망치듯 떠난 엄마에게 남은 건, 엄마 머릿속에 남은 상흔과 마음 한 곳이 텅 비어버린 공허함 뿐이었다.


다행인 건 엄마의 직장 동료와 후배들이 엄마를 대신해 기한 내에 무사히 명예퇴직원을 회사에 전달해 주어 명예퇴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 준 것이다. 직장에서 인연을 맺었지만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전주의 장례식장까지 3시간을 넘게 달려와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서 나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울어준 잊지 못할 그들.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는 훌쩍 늙어버렸다. 항암 때문이기도 했지만 직장에서 삶의 활력을 찾았던 엄마는 직장이라는 삶의 원동력을 잃어버리자, 목적 없이 바다를 떠도는 배처럼 표류했다.


그래도 엄마는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첫 항암 때 속이 울렁거려 저녁에 먹은 모든 음식을 게워내었을 때도, 엄마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자신은 비록 긴 투병생활을 하겠지만 그래도 살 것이라고. 결국에는 살아낼 것이라고.


엄마의 수술이 끝나고 취업 준비 때문에 전주로 다시 내려간 오빠와 갑자기 직장을 구해버린 아빠 때문에 한동안 엄마의 간호는 오롯이 내 몫이었다. 몇 날 며칠을 보호자 침대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에 사는 이모가 쉬는 날 병실에 들러 나에게 집에 가서 좀 쉬다 오라고 교대해 주었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 들러서 씻고 엄마의 짐도 챙길 겸 집으로 향했다.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다 숨이 찰 때쯤 도착한 내가 살던 빌라의 우편함에 낯선 엽서가 한 장 있었다.

우리 집으로 잘못 배달된 줄 알고 무심코 꺼낸 엽서에는 엄마의 글씨체로,

"사랑하는 딸에게, 엄마가. 수덕사에서"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작년 이맘때쯤 엄마가 수험 공부를 하는 나를 두고 오빠와 함께 수덕사로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나에게 엽서를 써서 1년 뒤에 배달되는 느린 우체통에 넣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내 딸.

엄마가 너와 함께 여기에 오지 못한 게 아쉽네.

우리 딸 공부하는 것. 그리고 부담스러운 심정 잘 알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결정이

나겠지. 어떤 결과든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네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

-사랑하는 딸에게, 수덕사에서-


1년 전, 수덕사에서 엄마는 나의 행복을 빌고 있었다.


나는 엽서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으로 주변을 향해 휘휘 저어 보이기도 했다. 영화 트루먼쇼처럼 이 공간이 세트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잘 짜인 촌극처럼 딱딱 들어맞는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할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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