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집으로 이사를 앞둔 어느 주말 아침.
거실에서 분주하게 짐을 싸던 내게 서재 방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던 남편이 멀리서 외쳤다.
"이 앨범 뭐야? 자기거 노트북 가방에 있던데 우리 집에 이런 게 있었어?"
앨범? 우리 집에 무슨 앨범이 있었지?
짐을 정리하다 말고 한참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남편이 한번 확인해 보라며 앨범을 불쑥 내밀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그러나 낡아서 옅은 베이지 빛에 가까워진 미색의 두꺼운 앨범에는 굵은 궁서체로
전주ㅇㅇ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앨범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아, 엄마 거다.
본가에서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엄마의 물건을 몇 개 챙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엄마의 고등학교 졸업앨범이었다. 그게 결혼하면서 신혼집까지 딸려왔던 것인데, 새삼 이 앨범을 가져온 뒤로 단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던 그날에 발견한 앨범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었겠지만,
나는 왜인지 한번 꺼내보고 싶어졌다.
앨범 첫 장을 펴니 웬 편지 한 통이 후드득 떨어졌다.
딱 봐도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흰색의 낡은 편지봉투.
발신인은 아빠가 아니었다.
발신인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꾹꾹 눌러쓴, 엄마가 단 한 번도 나에게 얘기해 준 적 없는 어떤 낯선 남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1980년 8월 1일 소인이 찍힌 그 편지는 엄마에게 보내는 절절한 연애편지였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다. 그렇기에 나는 엄마가 되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엄마도 내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한 여자였지.
자식을 생각하기 이전에 오롯이 제 스스로만 생각하던 그런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이제 내게 엄마라는 단어는 더 이상 고유명사로는 부를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강남 서울 S병원 신경외과병동 6인실의 보호자 침대에 누워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숨죽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침대에서 들리던 뒤척이던 소리. 무심한 나는 그때 엄마가 잠든 줄 알았지만, 엄마는 잠들지 않았었다. 딸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늦게까지 잠 못 이루던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5년 8월 연일 기록적인 더위를 경신하던 어느 날.
오랜 수험을 마치고 합격통지를 기다리던 내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저 날이 덥다, 비가 온다, 정도의 무게로.
"요새 엄마가 중심을 잘 못 잡고 자주 넘어진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녀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치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어떤 불안한 직감을 애써 누르면서.
“넘어진다고? 갑자기 왜?”
엄마가 가볍게 흘리듯 말했기에 나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엄마는 몸에 좋다고 하는 영양제나 건강식을 잘 챙겨 먹는 습관 덕분인지 감기 같은 흔한 질병에도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별일이 아닐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엄마는 서울에 본사를 둔 회사의 지사에서 30여 년을 쭉 일하다 사무처장 승진을 위해 몇 년 전 서울의 본사로 올라오게 되었고, 마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내가 휴학을 하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게 되면서 반전세로 구한 동작구의 한 빌라에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서울의 본사에서 엄마는 감사팀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마음이 모질지 못했던 엄마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하라고 하는 일은 그다지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독립하지 못한 두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한평생 직장이라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서 마음이 내킬 때만 회사에 다녔던 아빠를 대신해 혼자 오롯이 가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참고 견디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열정을 가지고 인생을 대했다. 은퇴 후 인생 제2막을 준비하기 위해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퇴근 후에도 독서실에 틀어박혀 새벽까지 공부해 유치원 정교사 2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그녀는 늘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엄마, 스트레스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닐까? 감사팀으로 가고 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잖아.”
내가 엄마에게 말했다.
“맞아. 그럴 거야.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그게 아니면 분명 노화 때문일 거야.” 엄마는 스스로를 그렇게 안심시켰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시적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엄마의 증상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증상은 더 심각해져 이제는 음식을 씹을 때 잘 씹히지 않는 것 같다며 엄마 말로는 저작기능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정확한 문장으로는 '밥을 먹는데 생각대로 음식이 씹히지 않고 자꾸 이에 끼는 것 같다'라고.
무지했던 나는 그때까지도 엄마가 중심을 못 잡고 휘청하는 것과 저작기능이 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 주변에는 뇌질환 환자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오감 말고도 육감. 일종의 어떤 촉이라는 게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엄마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큰일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며칠 뒤 엄마는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에 뇌 CT를 추가했다. 엄마가 자신의 증상을 말하니 검진센터에서 뇌 CT를 찍어보라는 조언을 했었나 보다. 그리고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엄마, 뇌경색이래.” 엄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즈음 나는 1년 넘게 준비한 시험에 합격했고, 우리 오빤 대기업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마침내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전주의 지사에서 사무처장의 직함을 달고 그동안 해왔던 모든 고생을 보상받을 일만 남아있었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란, 지금 닥친 불행만큼 앞으로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법칙.
보통 불행이 지속될 때 스스로를 달래면서 쓰는 말이지만, 우리 집은 그 반대였다.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행복이 우리 집에 프로그래밍된 행복의 총량을 초과했는지 우리에게 넘치는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