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엄마에게는 4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엄마의 유일한 여동생이고 친구이자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이모이다.
어릴 때 사업을 했던 이모부 덕분에 상대적으로 평일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이모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자주 오빠와 나를 도맡아서 돌보곤 했다.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어서 학부모가 꼭 와야 할 때 가끔 이모와 이모부가 와서 우리 남매와 김밥을 먹고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방학 내내 아예 이모네 집에 눌러앉다시피 할 때도 있었다. 서울에 사는 이모 덕분에 나와 오빠는 실컷 서울 구경을 했는데. 여름에는 사촌동생들과 함께 한강에 있는 야외수영장에서 놀기도 하고,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에서 질리도록 놀이기구를 타고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퍼레이드를 봤으며, 가끔은 강원도에 있는 워터파크에 가서 워터슬라이드를 타기도 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는 용인에 있는 애버랜드로 사파리를 보러 가거나 코엑스의 아쿠아리움을 가서 상어나 고래 같은 물고기를 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치원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는 외할머니 곁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우리 남매에게 이모네 집에 간다는 것은 곧 파티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화려한 서울의 네온사인을 보았고,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한강의 아름다운 윤슬을 보았다. 조용한 도시인 전주에서 살던 내게 이모가 보여준 서울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도 다름이 아니라 이모였다. 엄마의 조직검사 결과와 병명을 들으러 담당교수의 진료실에 우리 가족과 함께 들어간 것도 이모였다. 그때 당시에 이모가 다녔던 직장이 강남에 있었던 터라 엄마가 입원한 병원과 가까워서 짬이 날 때마다 거의 매일 엄마에게 들렀는데, 그때마다 이모의 손에는 강남 신세계 백화점에서 산 싱싱한 재료들로 직접 만든 정성스러운 요리와 과일이 가득했다.
이모는 젊을 때 사업을 했던 이모부와 꽤 오랜 시간 강남에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로 서울깍쟁이 같이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다. 170에 가까운 키와 그에 맞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이모는 어린아이였던 내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워서 어릴 땐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다.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웃으며 예쁜 사람 다 죽었냐며, 푼수도 이런 푼수도 없고 조심성도 없다고 했지만, 이게 다 하나뿐인 소중한 여동생에 대한 애정 어린 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퇴원을 하고 집에 오자 집에서 요리라고는 해 본 적 없던 나는 당장 엄마의 세끼가 걱정되었는데 그건 나에게 요리를 맡겨야 했던 이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다니던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엄마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이모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반드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과 엄마의 기력이 날 수 있게 도와주는 각종 보양식을 준비해서 우리 집에 방문했다. 이때 나에게 이모가 없었다면 무척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아직까지도 이모에게 미안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엄마가 투병했던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모는 엄마의 간병 말고도 어린 자식들의 뒷바라지와 각종 집안일, 그리고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외할머니까지 신경 쓸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지치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모가 내게 교대해 주겠다며 집에서 잠깐 쉬다 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 가서 씻고 몇 시간을 쉬다 왔는데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가 1층에서 이모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이모는 내게 이것 보라며 엄마의 모자를 벗겼는데, 보브컷에 컬이 풍성하게 들어가 있던 엄마의 머리가 깨끗하게 밀어져 있었다. 항암을 하면서 머리가 한 뭉텅이씩 빠지던 엄마는 통원치료를 받을 적엔 스카프를 둘러서 비어있는 부분을 가리거나 미용실에 가서 머리에 동전만 한 모양의 땜통이 안 보이게 가려달라고 했었는데, 다시금 병원에 오고 나서는 앞으로도 빠질 거 그냥 과감히 머리를 밀자고 했고, 그날로 병원 안에 있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깨끗이 밀어버렸다.
이모는 놀란 나를 보고 웃으며 "엄마는 나보다도 강해. 울지도 않더라"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이모의 얼굴이 어찌나 속상해 보였는지, 그날 그녀는 집에 가서 한바탕 눈물을 쏟지 않았을까.
나는 아기처럼 두상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엄마의 머리를 보고 새삼 그녀의 병이 실감 나고, 당신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지만 바쁜 출근시간에도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에 굵은 컬을 넣어 붕붕 띄우고 나서야 집을 나섰던 멋쟁이 엄마가 애지중지했던 머리를 밀어버려 속으로는 참 속상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슬퍼졌다.
엄마는 얼마간 대학병원에 있다가 개봉동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그즈음 내가 입사한 첫 직장에서 서울에서 ktx로도 약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 입사한 오빠도 평일엔 출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엔 이모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에 엄마를 입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항암이 끝나면 전주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간절한 당신의 마음과는 달리, 거동도 불편하고 혼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없는 엄마를 전주의 집에 둘 순 없었다. 게다가 아빠는 절대로 누구를 간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히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좋은 간병인을 만났고, 이모도 자주 올 수 있었고 주말마다 나와 오빠가 번갈아가며 병실에서 자면서 엄마의 말동무가 되었기 때문에 엄마는 병원에서도 심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이때는 다행히 약도 잘 들어서 엄마는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비록 아주 힘겹지만 휠체어에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2016년 여름,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오빠와 나와 이모는 휠체어에 엄마를 태우고선 요양병원 뒤에 있는 공원을 몇 바퀴씩 돌면서 산책했다. 분수에서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튀어 오르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배드민턴을 치는 아빠와 아들,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 모든 게 평화로웠다. 나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평온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는 엄마를 바라보며 부디 엄마가 이대로만 있어줬으면, 더는 욕심부리지 않겠으니 이 상태로 제발 멈춰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 평화로운 시간은 길게 허락되지 않았고, 행복했던 그 시간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오랜 기간 전주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외할머니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주말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던 이모와 우리 남매는 엄마의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미리 거짓말로 말을 맞춰놓았다. 다행히 엄마는 그날 왜 병원에 들르지 않았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고, 이모는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있는 병실에 가서는 외할머니의 부재를 떠올리는 그 어떤 얘기도 삼갔다.
엄마가 짐작을 했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 중 누구도 엄마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 무렵부터 엄마의 상태도 악화되기 시작했고 어눌하게나마 말로 의사소통을 했던 엄마는 어느 순간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리고 엄마의 끝없는 울음이 시작된 것도 바로 그즈음부터였다.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 때까지 토하듯 내뱉는 그 서러운 울음은 그치질 않았고,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우리는 그녀의 뇌종양이 혹시 뇌의 어떤 부분은 건드려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보았지만 병원에서는 뇌종양이 원인이 아니고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심리적인 이유가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그 울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당신의 '한'이었다.
매일 병실에 누워 아기처럼 엉엉 우는 언니를 보며 이모는 그 옆에 주저앉아 따라 울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엄마를 잃고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아픈 언니를 지켜봐야만 했던 그녀의 심정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늘 약해빠졌다고 이모를 걱정하던 엄마의 말과는 달리 슬픔은 이모를 잠식시키지 못했으며 고통은 결코 이모를 죽이지 못했다.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그녀는 고통을 머금고 더 자라나, 밀려오는 그를 향해 “어디 한번 내게 와 봐.” 하며 두 팔 벌려 끝까지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옆에서 이모를 지켜보았던 나는 나약해 보이지만, 어머니로서 딸로서 그리고 여동생으로서 그 누구보다 강하던 한 여성에게서 인간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