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맨 처음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따스하고 화사한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였다. 르누아르가 그리는 사랑스러운 여인들의 미소와, 모네의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연꽃이 하늘빛에 담기는 풍경들은 예술이야말로 삶의 면모를 가장 화창하게 비출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갓 스무 살에 접어든 청춘이라 삶을 낙관했을 때였다. 하필 독일 유학 나와서 맨 처음 방문한 전시에서 뭉크의 아담과 이브 판화 연작을 마주했다. 내가 알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와 완전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다분히 신성모독적이었고, 표현에 있어서도 거칠었다. 그 전시를 보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담은 뭉크의 판화 연작 <알파와 오메가>의 한 장면
후에 뭉크가 겪었던 삶의 상실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가 비범한 표현력으로 창조해낸 세계가 솔직한 내면의 거울을 통해 비춘 것임에 수긍했음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모든 예술적 표현은 옳은가? 저런 형상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가한가? 나쁜 말과 나쁜 행동에 대한 기준이 있듯이, 나쁜 그림에 대한 기준은 없는 것일까?
독일 유학 내내 따라다녔던 이 질문은, 훗날 뉴욕에서 크리스 오필리의 개인전을 본 이후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코끼리 똥을 빚은 후 실제 인간의 치아를 꽃아 만든 사람의 얼굴 형상의 제목이 <Shit Head>라니. 혹자는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똥이 음식을 만드는 연료와 상처를 치유하는 약재로 쓰이므로 다문화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왜 하필 코끼리 똥으로 인간의 형상을 빚으며, 진흙으로 빚어서 만들었다는 최초의 창조를 떠올리게 하여 "홀리 쉿"이라는 비속어로 수식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뉴욕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에서 열린 크리스 오필리의 전시 전경
성경은 이 세상이 아담과 이브의 원죄 이후로 타락했고,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한다. 이 말을 인간의 형상이라는 측면에서 풀어보자면,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은 왜곡되었으나, 원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와, 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형상만이 진실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유독 이 두 가지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작품들은 창조 그 자체의 진실성에 대한 물음으로 이끄는 듯하다.
1500년, 뒤러는 예수님을 그릴 때 사용하는 도상으로 본인의 자화상을 그렸다. 작품 속 섬세한 화가의 손이 유독 눈길을 끄는데, 이는 뒤러가 창조주의 모습을 빌어 창조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유추하게 한다. 작품을 완성한 뒤 4년 후 뒤러는 아담과 이브라는 또다른 걸작을 남긴다. 완벽한 인체 비율을 찾기 위해 연구했던 뒤러는 이 그림에서 일부러 팔과 다리를 왜곡 시켜 표현했는데, 이는 이 그림을 통해 나타나는 균형과 조화의 극대화를 위해서였다. 아담과 이브의 발 아래에는 고양이, 토끼, 사슴, 소가 보인다. 이 동물들은 각기 히포크라테스의 사성론에서 말하는 네 가지 기질, '혈액' '황담즙' '흑담즙' '점액'을 말한다. 네 동물이 모두 나타난 것은 아담과 이브가 모든 기질이 골고루 조화를 이룬 완전한 인간임을, 즉 타락 전의 모습임을 상징한다.
1504년 뒤러의 아담과 이브
뒤러의 제자였던 한스 발둥 그린은 1511년 스승 뒤러와 같이 아담과 이브를 소재로 판화를 제작했는데, 뱀과 유혹하는 이브의 몸짓으로 보아 그가 그린 시점은 인류의 원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1917년 독일 표현주의 화가 막스 클링어는 한스 발둥 그린이 보여준 것과 동일한 도상으로 목판화를 제작하는데, 독일 미술사학자 토마스 놀은 이를 에소테릭 사상의 영향으로 보았다. 실제로 막스 클링어는 신지학 협회를 창설하고 오컬트 문화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헬레나 블라바츠키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엔소르 또한 헬레나 블라바츠키와의 만남 이후에 예수로서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니, 유사한 흐름이 있다는 추측이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스 발둥 그린의 아담과 이브, 1511년작
기독교인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설파한 네덜란드의 기독교 미술사학자 한스 루크마커는 『Art needs no justification』, 즉 예술에는 정당화가 필요 없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남겼고, 프랜시스 쉐퍼는 『Art and the Bible』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창조성은 그 자체로 선하다고 말하고 있다. 창조성은 정말 그 자체로 선한가? 그렇다면 우린 창조의 올바른 방향성을 향해 더욱 힘써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