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모노하(もの派, mono-ha) 운동을 이끈 키시오 스가(1944~ )의 개인전이 조현화랑에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2월 18일까지 열린다. 조현화랑은 이번 개인전을 통해 1975년부터 2023년까지 제작된 작품을 전시하며, 50여년의 화업 동안 물체의 존재 방식과 이를 보는 시각에 대해 탐구해온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특유의 평면 오브제 작업과 더불어 전시장을 재해석한 장소특정적 설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회화나 조각이라는 기존의 예술 장르를 넘어 일종의 풍경을 통한 유동적 관계를 경험케 할 것으로 기대된다.
조현화랑1층에 설치되는 장소 특정적 작품은 전시 공간과 작품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2021년 증축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화랑은 돌계단을 따라 전시장으로 향하게 되어있다. 창쪽이 부채꼴인 이형평면의 공간은 바다와 숲이 전시 풍경과 하나가 되면서도 빛이 직접 들지 않도록 설계되어 미술과 주변 환경을 결합하는 동시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곳에 설치되는 작품은 부산의 하천에서 수집한 몽돌 550개와 구리선 500개로 구성되어 있다. 수천 년의 변성 주기에 의해 형성된 몽돌 덩어리를 자연 상태 그대로 가져와 바닥에 배열한 후, 그 사이사이를 일정한 길이의 구리선으로 연결하는 형태의 작업은 돌과 돌, 돌과 구리선, 작품과 전시장, 전시장과 외부 사이의 관계를 잇는다. 바깥 풍경의 돌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내부에 놓여진 돌들은 고유형태를 유지한 채로 관계의 맥락과 구조 속에 만남을 이어가는 물질의 본질을 지각하게 한다.
물체를 재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개념에서 벗어나, 이미 존재하는 물체의 존재 방식 그 자체를 다루는 키시오 스가는 나무, 금속, 돌, 종이, 로프, 콘크리트, 왁스, 비닐 등의 물체를 가공하지 않은 채 공간 안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가 작가로서 개입하는 지점은 중간 영역에 대한 조율이다.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물체와 물체, 물체와 공간, 공간과 사람 사이에 본질을 유지한채 자유롭게 방목되는 것, 이러한 관계성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작품 세계다.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떤 것의 한계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그대로의 한계를 파악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시장 2층에 설치되는 평면 작업들은 물체 내부의 다중 구조 공간을 드러낸다. 언뜻 캔버스 틀이 강조된 듯한 구조의 오브제들은 물체를 사용한 회화적 구성의 모방으로 보이나, 실제 작가가 탐구하는 것은 물체의 두께, 길이, 높이, 폭과 같은 입체의 존재 방식에 대한 명시이다. 이는 설치 작품에서의 물체와 물체, 전경과 후경, 존재와 무존재의 연속으로, 관계의 무한한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리드믹한 풍경을 질서로 연결하는 것은 상호 의존성이다. 자연 본연의 물체가 서로 의존함으로 연속되고 또 존재하는 것과 같이 자연물과 인공물의 만남은 무질서에 의존하는 구조와 구조에 의존하는 무질서로서의 총체를 대변한다.
1960년대 말, 70년대초에 걸쳐서 일어난 일본의 예술운동 모노하는 자연물과 인공물을 조합하여 유용성에서 해방된 물체 그 자체를 표상한 예술활동으로, 그중에서도 스가는 있는 그대로의 물체(もの)와의 만남을 통해 고유의 형태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물체의 본질이 드러나는 상황에 주목하는 이러한 발상은 격변하는 당시의 문화 및 정치적 상황, 전통 교육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당시 서양에서 진행된 미니멀리즘에 반응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볼 수 있다.
키시오 스가는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도쿄의 타마미술대학교를 다녔으며, 당시 아르테 포베라, 랜드아트 등의 국제적 흐름에 영향을 받은 노부 세키네, 지로 타카마츠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모노하를 탄생시켰다. 졸업 직후 자연과 사물을 이용한 일시적인 구성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이를 도쿄의 야외 장소에 배치하여 "필드워크"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실내 환경으로 옮기며, 파라핀 왁스로 만든 토템 모양의 "평행 지층" (1969)이나, 세로로 놓인 강철 판 네 장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인 "소프트 콘크리트" (1970)과 같은 전례 없는 설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제8회 파리 비엔날레, 제38회 및 제5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작품을 선보인 그는 지난 40년동안 파리의 국립 현대 미술 센터,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 등 유수의 미술관의 주요 전시에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뉴욕의 Dia: Chelsea와 밀라노의 피렐리 행거 비코카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다양한 공공 및 사립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