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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Apr 14. 2021

기록의 문제

온라인 유학 생존기 7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갭 이어도 날아가고, 유학도 늦춰지고, 배달 음식도 시키지 못하는 곳에 1년 이상을 머무르게 되었나 가끔 생각이 들면 하던 일도 손에 쉽게 잡히지가 않는다. 상상력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할 수 있었을 일, 내가 처했을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하는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일어날 수 있었던 좋은 일에 대해서는 가상의 자신까지 만들어 내서 질투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파리에서 한 달을 살 수 있었다면, 그 좋은 5구역 아파트에서 매일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보냈다면 적어도 책 한 권 분량의 글과 쓸 만한 프랑스어 실력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우중충한 아침에 일어나 집 앞 베이커리에서 벽돌 같은 바게트를 싸매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찍을 수 있다면, 적어도 더럽게 자연 친화적인 인공 교도소 같은 이 산 중턱 집보다는 좋을 텐데. 


    그렇지만 지나간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지금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 일이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될 수 있었던 과거를 상상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후회 중에 가장 쓸 데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에는 아무런 교훈도, 배움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변화는 대부분 좋지 않다. 


    혼자 살며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 일이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고 컴퓨터라는 도구를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경험에는 가장 중요한 물성이라는 요소가 없다. 그리고 화상 채팅에서 접속이 끊어진 상태의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 즉 나라는 개인을 계속해서 사회와 연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매일 수십 명의 다른 학생들과 부대끼는 고등학교 생활, 나아가 정상적인 대학교 생활과는 너무 다른 점이다. 사회의 집단적인 기억 속에 나 자신은 계속하여 등록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래서 나중에 지금 이 시기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상태는 사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성을 강제로 옅어지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내 상태와 생각을 계속해서 기록할 필요를 느낀다. 기록은 과거의 시간을 재구성하고, 기록이 없는 상태는 따라서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과도 같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데에서 오는 이점 중에 하나는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한 개인의 삶을 기억하고 향유한다는 건, 위인전과 영웅들의 이야기, 전설이 계속해서 구전된다는 건, 그 이야기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인간의 신체, 영웅적인 상황은 사라지고 없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야기는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공자는 여느 살아있는 대단한 사람들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기록하고자 할 때, 객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기록적인 성격의 글은 기록할 당시의 마음 상태, 건강, 인간관계에 큰 영향을 받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받아들일 만한, 완벽하게 객관적인 일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3인칭 화법을 쓴다고 해도,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일기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고유한 가치를 지닐 수 있고, 지금처럼 나만이 나를 관찰할 수 있는 시기에는 내가 기록한 것들만이 나를 대변하는 이야기가 된다. 누군가 훗날 내 일기를 보고 당신, 이때 이렇게 살지 않았잖아. 내가 봤어, 이 위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일기는 개인적일수록, 감정에 치우칠수록, 더 진솔하고 정확한 기록이자 정보가 된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 열심히 기록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기가 필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 내 삶을 대신 기억할 만큼, 내가 만난 사람들과 내가 한 일을 기억해줄 만큼 밀접한 인연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서로가 다른 사람의 일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할 만큼 가까운 삶일 것이고, 나는 그런 사람을 내 곁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일기는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담아두기 위한 일종의 연습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의 일기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 그만큼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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