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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Aug 18. 2021

광복절에 한국을 떠나며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다. 그동안 일기를 많이 못 쓴 이유는 나도 모른다. 짐작하건대 나의 나이브함이거나, 자신 있게 일기를 쓸 만큼 만족스럽게 살고 있지 못했거나. 둘 다일 수도. 11시간 동안 날아야 하는데 반쯤 왔다. 기내식을 비빔밥과 소고기 양식 중에 선택할 수 있었는데 후자를 골랐다. 기내식은 보통 별로 맛이 없는데, 마지막 한식의 이미지가 좋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먹은 마지막 한식은 팔공산 더덕정식집에서 먹은 육회 정식이었는데, 그 정도면 마지막 한 끼로 아주 훌륭한 편이다.


생각보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직 땅을 못 밟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현실 감각이 없다. 그냥 나는 미국으로 가고 있고, 그래서 비행기에 앉아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며칠 전에 미국으로의 비행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태평양을 건너가는 모든 비행편의 엄청난 사실을 불현듯 깨우치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10시 40분 비행기를 탔는데 시카고에 도착하면 같은 날 9시 30분이 된다. 과거로 가는 비행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잘 생각해보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한 바퀴를 도는 것이다. 비행기가 동쪽으로 비행하는 동안 지구도 동쪽으로 자전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12시간의 시차를 뛰어넘을 동안 지구도 12시간만큼 도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비행기는 아침에 출발해서 아침에 땅에 내리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은 경도상으로 보았을 때 같은 곳에서 떠서 같은 곳에 다시 내리는 것이다! 단돈 230만 원으로 나는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쯤이지만 매디슨 시간으로는 새벽 3시쯤 된다. 그러니까 시차를 극복하려면 나는 지금 자고 있어야 하는데, 비행기 조명이 거진 이륙하자마자 꺼진 바람에 나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네 시간쯤 잠들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방금 포기했다. 될 대로 되라지.


기내 간식이 점점 업데이트 되는 모양이다. 바나나와 피자를 먹을 수 있다. 피자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냉동 피자가 아니라 진짜 지상에 있는 피자 전문점에서 포장을 한 다음 굳이 타자마자 안 먹이고 식혀서 어느 정도 맛이 없게 만든 다음에 다시 엄청나게 뜨겁게 데워서 마치 방금 조리한 것 마냥 내어놓는 것 같다. 물론 간식 타이밍이 정해져 있겠지만, 냉동 음식이 아니라면 굳이 음식의 맛 파워가 떨어진 상태에서 먹일 이유가 있나. 그냥 타자마자 갓 조리한 맛있는 피자를 드릴 테니 이륙과 함께 입맛도 날아오르세요, 하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아직도 에어팟 프로의 노이즈 캔슬링을 처음 경험해보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인생에는 너무 충격적이거나 기뻐서 기억에 가장 강하게 각인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에어팟 프로가 그중에 하나였다. 세상이 고요해지는 느낌. 나는 비행기에서 에어팟 프로의 노캔을 켜는 상상을 하면서 지난 한 달을 보냈다. 듣자 하니 노이즈 캔슬링은 일정하게 발산되는 파장을 상쇄 시키는 데에 특화된 기술이고, 비행기는 항상 같은 소리로 시끄럽기 때문에 이론상 가장 완벽한 상성이 아닌가. 막상 체험해보니 차이가 버스를 탈 때보다는 크긴 하지만, 완벽하게 고요한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세운 가설은 비행기의 소음은 기체의 진동으로 생기는 것이고, 내가 그 안에 타 있기 때문에 진동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귀로 들어오는 소음은 막아주지만, 발바닥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수백 톤짜리 철덩이의 진동은 가냘픈 에어팟 프로가 감히 막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처음 자취를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행으로 방문했던 미국의 이미지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는 내가 곧 밟게 될 미국을 상상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회색 빛을 띠고 있고, 도시는 황폐하다. 서부극의 여관 대신 현대식 건물들이 듬성듬성 놓인 황야의 교차로 같은 느낌을 자꾸 상상하는데, 머리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일단 매디슨에는 사막이 없을 뿐더러, 인구수가 적은 북미의 여느 도시들처럼 밴쿠버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사람이 주변을 인지하는 데에는 정신적인 상태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아마 나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가구가 하나도 없는 쉬보이건의 아파트에서 주저앉아 울지도 모른다.


농담으로 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전기 문제가 심각하다. 내가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기국에 따로 문의를 해놓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있다. 아마 월요일에 신청해서 당일 전기가 들어온다면 밤에 초는  켜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로 불빛으로 며칠을 버텨야  수도 있다.


이런 온갖 부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질 일이라고 믿는다. 비관적인 사람의 미래는 예측보다 좋기 마련이고, 사람이 발 붙이고 사는 곳에는 어떻게든 생존할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자신감을 유지하는 일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벽 시간에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면서도, 미래의 내가 시간차를 잘 극복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1년 동안 낮밤이 바뀌는 온라인 수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한 번만 바꾸면 된다!


인천공항.


한국 시간으로 어제 인천공항 1터미널에 있는 캡슐호텔에서 묵었다. 생각보다 좁지 않아서 놀랐고, 저녁에 문을 연 식당이 없어서 놀맀다. 유일하게 문을 연 KFC에서 불고기버거 세트를 테이크 아웃해서 먹었다. 나는 KFC의 감자튀김이 그렇게 맛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왜 아직까지 이걸 몰랐지. 당연하지. 배달도 안 되는 산 중턱에서 1년 반을 살았는데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 맛을 알고 있을 리가. 하여튼 손가락까지 쪽쪽 빨면서 다 먹었다.


비행기를 타면서 기타를 가져가려고 했는데, 캐리어 때문에 포기했다. 그게 왜 연관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황당했다고 먼저 말해 두고 싶다. 캐리어가 앞으로 나가질 못한다! 술마신 사람처럼 앞으로 밀면 휘청했다가 애매한 사선으로 느릿하게 밀리면서 간다. 바퀴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게 분배가 이상한 것도 아닌데 한 손으로는 절대로 똑바로 밀 수가 없다. 끌거나 두 손으로 밀거나 해야 하는데, 전자는  팔꿈치 관절이 빠질 것 같고 후자는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있으면 시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타는 따로 부모님이 부쳐주시기로 했다. 그러므로 만약에 방에 도착하고 나서 우울한 일들이 생기면, 나는 기타가 없어서 우울해 죽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는 말 안 듣는 자식을 어떻게든 키우는 과정이 절뚝거리는 캐리어를 밀고 가는 일과 닮아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이 캐리어가 없으면 미국에 못 가고, 부모는 자식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비록 캐리어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애증의 관계인 듯하다. 예비 여행자들에게, 제발 캐리어는 바퀴가 좋은 것을 사라고 말해두고 싶다.


비행기.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는 중간 자리들이 듬성듬성 비어있어서 사람이 별로 안 타겠다고 생각했는데, 자리가 거의 다 찼다. 예전만큼 앞 좌석에 붙어 있는 멀티미디어 스크린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대부분 잠을 자거나 아이패드를 꺼내서 무언가를 하고들 있다. 아마 넷플릿스와 왓챠의 영향 아닐까. 수백 편의 영화를 두께 9mm도 안 되는 유리판에 저장해서 다닐 수 있는데 굳이 종류도 제한적인 기내 영화를 볼 이유가 없는 게 사실이다. 비행기 스크린보다 내 아이패드가 더 좋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좋은 건가?


컨텐츠인가 콘텐츠인가.


벌써 글을 40분째 쓰고 있다. 확실히 안 쓰다가 쓰니까 쓸 말이 많다. 아니면 원래 생각이 많은 건가. 아니면 이 글 자체가 TMI가 되어가고 있는가. 태평양을 거의 다 건너왔다. 아무쪼록 자주 글을 쓰자.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근데 귀찮은 사람이기도 하다. 충분히 귀찮게 살았으니까 이제 좀 덜 귀찮아해도 된다. 어차피 할 일들인데 뭐하러 자기죄의식을 쌓아가면서 일을 하나. 그냥 하고 말지. 일을 미루든 말든 일은 하게 되어있고, 차이는 미뤘을 때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점밖에 없다. 미리 하자. 미리 하다 보면 게임이나 인방이나 유튜브 같은 것들은 매력을 잃게 될 것이다. 조던 피터슨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오로지 행복을 느끼므로.


미래의 나에게.


잘 도착했니. 방은 어떠니. 침대와 책상과 스탠드는 잘 왔니. 전기는 어떻게 했니. 아니면 어둠 속에서 떨고 있니. 그냥 눈 좀 붙이고 자. 할 일이 많잖니. 정신차리고 잘 살자. 개강은 좀 남았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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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오헤어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다. 그 사이에 또 한 끼니를 먹었다. 놀랍게도 11시간동안 단 한 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 기록적인 날이다. 창세기를 조금 읽고 이슬아의 수필집을 읽었다. 좋은 글들이다.


이슬아의 글들을 보면, 어떻게 일상의 기억을 저렇게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김영하의 산문이나 강이슬 작가의 글들도 마찬가지인데, 특정 상황을 기억하는 것을 떠나서 서로의 대화, 마신 음료의 빛깔과 냄새를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한 능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망각함으로써 얻는 무언가도 있다고 믿는다.


45분 정도 남았다고 한다. 비행기의 분위기가 조금 들떴다. 이제 땅을 밟으면 다시 15일 아침으로 돌아간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의 류준열처럼 이 비행기가 나에게는 마지막 한국이고, 곧 이곳에서 내린다는 생각은 설레면서 동시에 긴장되는 일이다. 미국은 넓고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니까. 오늘 밤에 일기를 쓴다면 하루에 두 번 일기를 쓸 수 있다. 일단 매디슨에 도착하자.


비행기가 착륙하려고 10초에 200미터씩 하강하고 있다. 1초에 20미터씩 떨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1초에 10미터를 뛴다는 사실처럼. 비행기는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추락하고 있으면서,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시속 1000킬로미터의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떨어지면서도, 충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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