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마세요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더니, 이젠 그것조차 옛말이 되었나. 4월도 채 되지 않아 흐드러지게 피어날 줄이야. 확실히 이상한 날씨다. 봄의 초입치고는 햇볕은 과하게 따스한 데다 익숙한 꽃샘추위마저 없는 듯 지나갔다. 모두가 기다리던 손님인 봄이건만, 다들 반가움보다는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다. 벌써 이렇게 따뜻하다고? 지구온난화가 심각하긴 하구나, 올여름은 얼마나 더우려고 이러지. 저마다 그렇게 한 마디씩.
우울하다. 사계 중 가장 좋아하는 봄이 달갑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봄을 맞이해 분주해지는 풍경도 활기도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정확하게는 나만 그 설렘을 비껴가고 있는 기분이다. 차라리 늦게 오지. 짧디 짧은 봄이라서 우울감을 회복하기도 전에 지나가버릴 걸 안다. 행복을 주던 봄이 이번엔 소외감을 준다.
젖어버린 빨래처럼 축 늘어져 지내던 어느 날,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울 산에 오른 적 있다. 도심 가까이에 있는 높지 않고 평탄한 산이었다. 우리는 정상까지 씩씩하게 올랐다. 친구는 시야만 바꿨을 뿐인데, 모든 게 개미만큼 사실 작은 거였다며 웃었다.
큰 산에 등반이라도 한 것처럼 소원을 빌라고 했다. 새삼스럽다는 말에도 친구는 꿋꿋하게 올해만큼은 꼭 취업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벌써 5번째 최종 면접에 떨어진 친구라서, 거창한 수식어로 말하지 않아도 그 간절함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그 모습이, 마음이 아리도록 빛이 났다.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같이 기도했다. 친구가 꼭 취업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원하는 곳에 가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빌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를 망치기는 싫어서 올해는 더 행복한 일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말했다. 산을 내려오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그 질문은 겨울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기력한 낮과 영혼을 갉아가는 밤, 그 굴레 속에서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 채로. 충동적으로 학교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나는 늘 학교로 가서 이곳저곳을 망령처럼 맴돌았다. 첫사랑과 이별을 했을 때도, 엄마랑 싸우고 나서도. 내가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날도 발걸음이 닿는 대로 학교를 돌아다니던 나는 기도실 앞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그곳은 고요했고 어두웠다. 포근한 나무 향기가 느껴졌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다가 흠칫하고 놀라버렸다. 이미 누군가가 안에 있던 까닭이다. 개인적인 공간을 침해해버린 것 같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나가자니, 그것 또한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맨 앞줄로 살금살금 걸어가 앉았다.
고작 다섯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의 가장 앞과 가장 뒤에 우리는 각각 앉아있었다. 작은 숨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숨소리는 점점 훌쩍거리는 소리로 바뀌어갔다. 뒤에 앉은 그분이 아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이 공간에선 그래도 된다는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 작은 고통을 듣고 있으니 내 눈에서도 무언가 쏟아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오래도록 같이 울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 작은 공간에 나와 함께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작은 흐느낌이 사그라들 때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울었던 것처럼, 나는 그를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제발 나를 혼자 두지 말아 달라고. 지금 나는 너무도 불안정하고 미성숙하다고. 혼자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나를 사랑한다면 혼자 두지 말라고.
벚꽃이 만개를 지나 조금씩 져간다. 안에서 보고만 있자니 이렇게 스쳐가는 봄이 야속하다. 저 활기가 나와 대조되어 더욱 초라해진다. 꽃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만 보다 꾸역꾸역 마음을 다잡아 밖으로 나왔다.
완연하게 봄의 기운을 띠고 있는 햇볕이 목 뒤로 떨어진다. 창문을 투과하지 않고 맞는 햇살이 따뜻하다. 이렇게 포근하니 꽃들이 빨리 폈구나. 3월의 바람이라기엔 날카롭지도 차지도 않다. 부드러운 강아지의 꼬리 같다. 거리에는 벚꽃 말고도 라일락이 피어나고 튤립이 피어나고 제비꽃이 피어난다. 햇볕과 바람과 꽃을 벗 삼아 걸었다. 오랜만에 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