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상사 이야기
제과회사 캐릭터 프로젝트를 마친 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캐릭터 프로젝트가 생겼다. 이번에도 대표 C의 인턴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새 프로젝트의 총괄 기획 역시 인턴 E가 맡았다. 그쯤 되자 들어온 지 3달 정도 된 신입직원 F가 나에게 ‘대표님 일 할당을 좀 이상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아요?’하고 물어왔다. 나와 신입직원 F가 일종의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표 C는 늘 그랬듯 회사를 잘 키우기 위해 땀 흘리며 열심이었다.
인턴 E 역시 매사에 열심이었다. 결과야 어떻든 기획 아이디어를 낼 때도 늘 열정적이었고 다른 직원의 말도 귀담아들으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열심히 하는 인턴 E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며 나는 지금 상황을 내려놓으려 애썼다.
일이 터진 건 어느 날 회의 때였다. 캐릭터 기획을 위해 대표 C와 PD, 인턴 E가 회의를 갖기로 했는데 내가 전부터 날이 선 것을 알아차렸는지 대표 C가 내게도 함께 회의하자고 했다. 나는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있어서 세 사람보다 늦게 회의실에 들어갔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땐 한창 마무리 단계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들어오자 대표 C는 나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했다. 듣고 있으니 ‘정말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는 식으로 말했다. 참고로 나는 작업에 관해 어지간해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었다. 좋으면 좋다 했고, 별로면 별로라 했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으니 설명해 달라고 했다. 물론 나의 이런 화법에 대표도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의 문제는 말보다는 ‘말투’였다. 근래 대표 C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쌓고 있던 탓인지 말투가 평소보다 삐딱하게 나갔고, 대표는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솔직히 내가 뱉어 놓고도 ‘와, 이런 말투는 좀 안 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표 C는 굳은 얼굴로 나머지 직원을 내보내고 나만 회의실에 남겼다. 대표 C는 내게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말했고, 난 ‘말씀하신 게 별로인 것 같아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대표는 ‘말투는 그게 뭐야? 회사 일이 장난이야? 감정적으로 말하게?’하고 말했다. 역시 말투가 문제였다. 나 역시 잘못인 줄 알았지만 순간 대표의 말이 기분 나빴다.
나는 단 한 번도 회사 일에 장난이었던 때가 없었다. 서울살이 이야기에서 얘기하겠지만 나는 생계를 위해서도 진심이어야 했고, 나 자신도 장난처럼 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잘못된 말투 한 번에 내가 했던 모든 일이 장난 취급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내가 자초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대표 C에게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가 회사 일을 장난으로 했으면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주말까지 나오면서 밤 11시까지 야근했겠어요? 야근 수당도 못 받고?’ 그 말에 대표 C는 ‘너 요즘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했다.
그 말에 나는 ‘대표님 제가 예전부터 교육용 말고 다른 프로젝트 해 보고 싶었다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기획 프로세스부터 하고 싶어 한 것도 말한 적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인턴한테 다 맡기면 어떡해요? 너무 부당한 것 아니에요?’부터 시작해서 그간 꾹꾹 눌러 담아 놓았던 생각을 뱉었다.
‘너 인턴한테 질투하니?’ 내 말을 들은 대표 C의 대답이 너무 예상 밖이라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때 나는 회사에서 상사와 얘기할 때는 절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업무 분담에 대해 내가 부당하다고 느낀 게 질투라니. 이때 깨달은 이후, 나는 다른 회사에서는 상사에게 어지간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물론 예외는 있었지만.
‘질투가 아니라 대표님한테 서운한 건데요? 어떻게 1년 넘게 같이 일한 직원이 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제대로 기회도 안 줘놓고 인턴이 드로잉 할 줄 모른다고 냅다 총괄 기획을 넘기는 건 너무 불합리한 거 아니에요?’ 어쨌든 경력 1년이 갓 넘은 사회생활 새내기는 잔뜩 날 선 말을 내뱉었다.
‘저는 제가 일 하면서 프린트 기계가 된 것 같아요. 입력하는 대로만 뽑아내는 프린트 기계요.’ 내 말에 대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화를 내다가 내게 회의실을 나가라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혼자 분을 삭였다.
그 일이 있고 몇 달 후, 나는 퇴사했다. 경제적 상황이 퇴사의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어찌 되었든 이 회사에서 제대로 무언가 해 볼 수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동고동락한 정이 쌓였는지, 나올 때가 되자 서운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모두 들었다. 만약 내가 좀 더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이었다면 회사에 더 나은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표 C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나가는 날 나에게 그동안 잘해줘서 고맙고 능력을 모두 펼칠 만한 기회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야말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상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