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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Aug 27. 2019

고통과 인내의 두 시간

세 번째, 화장실 이야기

이번 화장실 에피소드는 대학생 때 겪었던 일이다. 아주 뜨거운 여름, 그 날은 토익 시험이 있었다. 왜인지 잘 모르지만 토익 시험은 늘 이른 아침 시간에 있었기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인근 시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시험장이 멀지 않아서 여유롭게 도착한 나는 화장실도 다녀오고 단어장도 다시 들춰보았다. 그 뒤로 면접관의 시험 설명이 이어지고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화장실을 갈 기회가 생기면 어지간하면 갔기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 화장실도 다녀왔다.


곧 본격적인 시험이 시작되고 듣기 문제를 반 정도 풀고 있을 때쯤, 신호가 오고 말았다. ‘꾸루룩’. 제발 지금 이 순간만은 들리지 않길 바란 신호였는데, 내 바람이 처참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먹은 게 잘못됐나?’ 그렇게 생각하니 배가 더 싸해지는 듯했다.


게다가 한 여름이던 그 날, 교실 안은 행여 수험생들이 OMR 카드에 땀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딱 그 아래 있었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은 자꾸만 내 배를 건드렸고 그럴 때마다 뱃속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꾸룩꾸룩’ 요동쳤다.


하지만 토익은 비쌌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4만 원 돈 했던 것 같다. 심지어 나는 정기접수를 놓친 탓에 추가 접수한 거라 그것보다 더 비쌌다. 지금도 물론 아깝지만, 당시 학생이던 나에게 그 돈은 밥을 몇 끼나 사 먹을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시험을 포기하기란 어려웠다. 결국 그때부터 약 2시간 동안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신호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문제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배가 아프단 것을 잊고 오롯이 시험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우려와 달리 잠깐의 소동이었구나 생각하며 RC문제로 넘어가는 순간, 다시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금 전이 강에 돌멩이를 던져 생긴 파동이라면 이번은 방파제를 덮칠 만큼 대단한 기세로 밀려오는 파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거세게 난동을 부리는 배를 잠재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며 겨우겨우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 제일 뒷자리에 앉아 있어서 내 행동이 다른 수험자에게 덜 띄었다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달래는 내 손길에도 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쯤 되니 이러다 정말 큰일 치르겠단 생각이 들었고 시험을 포기하고 나가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4만 원. 딱 그 반값인 2만 원 정도였다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 대가로 시험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4만 원은 너무 크게 느껴졌다. 하는 수 없이 시험 포기를 포기하고 한쪽 발을 엉덩이에 괴고 앉아 물리적으로 막아보려 했다. 돈이 아까워 이런 자세로 시험을 치고 있는 내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상상해보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참은 이상 어떻게 해서든 시험 마칠 때까지 버텨야 했다. 왼발을 괴다가 오른발을 괴다가 양반다리를 했다가 별별 짓을 다 하고서야 마침내 시험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살았다. 시험이 끝나자 가장 먼저 이 생각이 들었고, 나는 서둘러 교실 밖을 나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힝! 속았지?’ 누군가 내 귀에다 대고 약 올리는 것 같았다. 또는 ‘하핫! 페이크다!’라고 비웃는다거나. 그렇게 기다려온 순간인데, 막상 변기에 앉으니 뱃속은 고요했다. 내 몸에 내 정신이 낚인 거다. 2시간 동안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제는 화장실이 급하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쩐지 2시간 동안의 고생이 헛수고가 된 것 같아 허무했지만 끝난 일이니 별 수 있나 생각하며 화장실을 나섰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시험 때 그 난리가 있었는데 그날 친 시험 점수는 앞자리 숫자가 바뀔 만큼 올라 있었다. 뱃속이 전쟁터가 된 동안 뇌세포에서 영웅이 난 모양이었다. 민감한 장 때문에 시험 2시간 동안 고통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발휘한 집중력 덕에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란 말은 정말인 모양이다.

고통과 인내의 토익시험. 이 일 이후, 시험 전에 아무것도 먹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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