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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Aug 29. 2019

아니, 전 괜찮습니다.

네 번째, 화장실 이야기

마지막 화장실 에피소드는 휴학생 때 알바를 하러 다니며 생긴 일이다. 대학교 3학년 2학기를 마친 후, 나는 유럽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휴학하고 작은 가구 공방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공방까지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걸렸는데, 당연히 이때도 내 민감한 장은 열일 했다.




그날은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이른 아침 버스에 올라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출근 중이었다. 하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겨울바람 탓이었을까. 갑자기 배에 한기가 도는 듯하더니 속이 불편해졌다. 몇 정류장만 지나면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거기 내려서 화장실을 들렀다 갈까 싶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 정도면 공방까지는 무사히 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버스를 내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 화장실을 들르고 다시 버스를 기다려 공방으로 가기엔 날씨가 너무 춥고, 시간이 빠듯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지하철역을 지나쳤을 때, 갑자기 배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꾸루룩’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는 정말 ‘아차’ 싶었다. 이미 몇 번 겪었으면서 민감한 장을 얕본 벌이었을까. 그때부터 내 뱃속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앉아 있으니 괜히 몸통이 접히면서 더 자극되는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뒷문으로 갔다. 일단 무조건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날따라 차가 막히는지 버스는 도로 한복판에서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하게 버스 문을 바라보았지만 사실은 입술을 앙 다물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최대한 힘을 발휘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움직이던 버스가 또다시 신호에 걸려 멈추자 초조함이 폭발했다.


결국 기사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여기서 세워주시면 안 돼요? 화장실이 급해서···.’ 당연히 안 될 말인 걸 알았지만, 너무나 간절한 마음이었다. 예상대로 기사 아저씨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초조하게 두 발을 움직이며 뒷문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뒷문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어휴, 괜찮아요?’라며 걱정하는 말을 했고 그러자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조금만 참아요!’, ‘아까 지하철역이었는데 그때 내리지!’, ‘다음 정류장 금방이니까 걱정 마요!’ 라며 나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너무 창피했다. 세상에 화장실 참는 일로 응원을 받다니. ‘아니, 전 괜찮습니다.’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찮지 않았기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버스 기둥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스럽게도 꽉 막히는 네거리를 지난 버스는 금방 다음 정류장에 섰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버스를 내렸다.     




그날 충격이 꽤 컸는지 이후 버스를 타고 그 지하철역 근처만 가면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참으려고 해 봤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결국 버스를 내려 지하철역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렇게 일주일간 버스를 내려 지하철역 화장실에 가는 일을 일종의 출근 루틴처럼 반복했다. 그래서 지각했고, 지각하지 않으려 원래보다 20분 더 일찍 집을 나섰다. 그 짓을 반복하던 일주일은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다행히 이러다간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꾹 참고 그 지하철역을 지나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루틴이 깨졌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사소한 것에도 큰 영향을 받아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구나 싶었다.

화장실 참는 일로 응원 받은 신기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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