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을 만나러 갔다
광고 녹음실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성우나 모델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음악을 만들고 여러 가지 재료들을 잘 버무려 믹싱을 하면 TV에서 나오는 CF 속에서 들리는 사운드가 만들어진다. 음악과 소리를 다루는 일이 음식을 만드는 일과 비슷하다 싶기도 하고 나름 요리에 소질이 있다 싶어 스튜디오의 이름을 [사운드키친]이라고 붙였다. 스스로는 감히 <마스터 쉐프>라는 타이틀도 붙였다. 20년을 넘게 해온 일이라지만 50이 넘어 새로운 스튜디오를 만드는 일이 쉽진 않았다. 하필 코로나가 막 유행하던 시기에 문을 열었다. "저 다시 또 시작해요~"라고 근사하게 개업식, 오픈 파티라도 하고 싶었지만 꿈도 꿀 수 없었다. 어렵게 첫 발을 내딛고 이제 대략 1년 반의 시간이 지났는데 여태 걸음마 중이다. 빠른 아이들 같으면 뛰어다닐 때도 됐는데 아직도 아장아장 비틀거리고 있다. 이름도 그렇지만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일도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과 다르지 않다 싶을 때가 많다. 줄을 서는 맛집이 아니라 워라벨을 지킬 수 있는 원 테이블 레스토랑을 원했지만 아직도 빈 테이블로 남아있는 날들이 더 많다. 그래도 바쁠 땐 꽤 바쁘다. 손님이 좀 꾸준하게 차면 좋으련만 심하게 들쑥날쑥한다. 몰릴 때는 또 너무 몰려 힘에 겨워 버둥대지만 한가할 때는 또 거의 개점휴업상태다. 비어있는 테이블, 아니 스튜디오를 바라보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일이 많으면 어깨가 아프다. 하루 종일 칼질... 아니 마우스 질을 하다 보니 생기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팔이 빠질 듯이 아프다. 어깨가 아픈 건 통증주사도 맞고 도수치료도 받고 진통제와 근육 이완제를 열심히 먹으면 그런대로 버틸만하다. 일이 없으면 머리가 아프다. 이건 대책이 없다. 평소에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온갖 잡생각을 산더미처럼 이고 지고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긴 다는 건 정말 버티기 힘든 상태가 찾아온다는 의미다. 쉬지 않고 점화되는 뉴런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사슬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생각의 사슬에 묶여버린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미뤄놨던 책이라도 좀 보면 좋으련만 글자 하나하나가 종이 표면으로 떠올라 사라져 버린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도 딱 고막에서 멈춰버린다. 듣고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오히려 생각의 사슬만 더 베베 꼬아놓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술이 당기는 (타고난 듯한) 음주 본능도 작동 오류가 생기는 것 같다. 머리가 복잡하면 몸도 마음도 얼어붙어 버린다. 꼼짝달싹 할 수가 없다.
지난 주말, [뮤지엄 산]을 만나러 갔다. 작년 가을쯤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다가 일정이 꼬여서 포기했던 곳이다. 검색창을 열었다. [뮤지엄 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제임스 터렐관]은 30분 간격으로 28명씩만 입장을 할 수 있단다. 일요일 오후, 차는 얼마나 막히려나? 네비를 찍어보니 90킬로미터 거리에 1시간 20분. 예상 경로에 빨간 선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무려 27명이 같은 목적지로 이동 중이란다. 티맵을 쓰지 않는 사람까지 계산하면... 다시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러다 그냥 주저 않겠다 싶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캔커피부터 챙겼다. 그래, 가자. 안도 다다오와 제임스 터렐을 만나러 가자.
12시에 출발해 1시 반 도착. 마침 2시부터 도슨트 투어가 있단다. 열댓 명 남짓한 무리의 일원이 되어 열심히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었다. "이게 무엇을 형상화한 건지 맞춰보시겠어요?" 누가 봐도 사람? 제목부터가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가 아닌가. 황조롱이 새란다. '제라드 먼리 홉킨스'는 시인이란다. 앞으로 나란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팔 모양이 새의 날개다. 더 놀라운 건 새의 날개와 머리가 움직인다는 사실. 바람에 의해. 미처 몰랐다. 자세히 보니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 건축에 쓰이는 무거운 철강 H-빔으로 만든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조형물이 움직인다! 도슨트의 설명이 없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찬찬히 오래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놓치는 게 많겠지. 생각이 또 꼬리를 문다. "자. 이동하시죠~" 그래 이럴 땐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게 상책이다.
“왜~?”, “왜~~?” “아~~, 근데 그건 왜~~~?”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말문이 트이면서 질문이 터지는 나이가 있다. 해맑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미소에 열심히 답을 해주다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공세는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게 궁금하던 아이들도 나이가 들면서 질문이 줄어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기도 하고, 세상은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 금방 알아차리게 되니까. 어른이 돼서도, 아니 죽는 순간까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과학자와) 철학자가 아닐까? 그러니 철학자들만큼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철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여정의 출발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의 대상은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궁금해하지 않는, 당연히 여기는 것들이다. (답이 없어 보이는) 질문들로 가득한 그들의 머릿속이 온전할 수 있을까? 온갖 기행을 일삼은 소크라테스부터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루이 알튀세르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현대 정신건강의학의 진단 기준으로 평가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 상당수가 병원 신세를 졌을 테다. 그런데 이처럼 머릿속 복잡하기로는 으뜸일 철학자들이 공유하는 '철학하기'의 출발점은 '걷기'다. 걷기, 산책으로 치자면 칸트, 홉스, 소로, 루소, 니체 등등 모두가 쟁쟁하다. (적어도 니체에게는) 설렁설렁 동네 한 바퀴 도는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바쁜 걸음으로 걷는 것이 당시 독일인들이 생각하던 산책이다” <니체와 함께 산책을>의 저자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알려준다. 어찌 보면 '걷기'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철학자들 나름의 생존전략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히코가 덧붙여준다. “산책이란 니체에게 현실적인 구원”이라고. 요즘 그나마 가까스로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에릭 와이너(이 사람의 글솜씨는 정말 샘이 난다)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다. 이 책 제3장 의 타이틀은 ‘루소처럼 걷기'다. "바깥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이동할 때 탄생하지 않은 생각은 그 어떤 것도 믿어선 안된다." 니체의 말처럼 걷지 않고서는 철학자가 될 수 없다. 에릭 와이너가 말한다. "우리는 손으로 글을 쓴다. 발로는 더 좋은 글을 쓴다." 철학까지는 잘 모르겠고, 나는 그저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기 위해, 살기 위해 걷는다. [뮤지엄 산]의 자작나무 숲을 걷는다.
스튜디오 공사를 몇 번 하면서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됐다.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처음 보여준 도면과 멋진 조감도를 절대 믿으면 안 된다. 공사가 마무리된 공간은 전혀 다른 모습일 테니까. 조감도에서 본 핑크 컬러와 스튜디오 벽의 핑크 컬러는 전혀 다른 색깔이다. 이번 달 말까지 바닥공사가 마무리될 거라고 했으니 다음 달에는 들어가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약속은 늘 여러 가지 '불가피한' 사정으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믿는 게 속이 편하다. 달콤한 미사여구로, 지켜지지 않을 약속으로 '허황된 꿈'을 꾸게 만드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건축가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건축가'라는 부류의 사람들에게 불신의 선글라스를 끼게 되지만, 그래도 안도 다다오(타다오? 다다오? 'Tadao'면 타다오가 맞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나라 맞춤법으로는 '다다오'가 맞는 표기인 것 같다)는 뭔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인 것은 틀림없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어 개 봤고, 자서전도 읽었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은 거의 나지 않는다. 다만 겉면이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노출 콘크리트 벽을 보면 그의 이름이 떠오르는 조건반사는 아직 남아있다.
경사진 산 언덕의 지형과 노출 콘크리트와 돌담 벽을 교묘하게 이용해 안도 다다오는 '숨기기'와 '보여주기' 놀이를 하고 있다. 막힌 듯한 공간은 곧 열리고, 열려있던 발걸음은 금세 막다른 벽에 다다른다. 발걸음을 조금 옮기다 보니 회색 콘크리트 아트월 위로 빨간색 조형물이 슬며시 드러난다. 이걸 제대로 보려면 벽을 돌아 돌아가야 한다. 도슨트의 해설이 붙는다. "안도 다다오는 이렇게 전체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동선에 따라서 조금씩 드러나게 만들어서 더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공간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변화를 준다? 그렇지, 공간과 시간이 독립적이지 않고 하나로 묶여 '시공간'을 이룬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아닌가? “모든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가 귀띔해준다. 살짝 고쳐 말하고 싶다. “모든 존재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만든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며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를 만나면 속이 터진다. 반대로 시속 30킬로미터로 움직이며 시속 6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를 보면 욕이 나온다. 생체시계(biological clock)도 그렇다. 세포 분열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특히 뇌세포의 성장은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아이에게 세상은 느려 터진 것처럼 보인다. 참을성이 없다고 아이들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 반대로 성장이 멈추고 생체시계가 점점 느려지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으로 실제로 모든 것들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기도 하다.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처음 장만한 '286' 컴퓨터 CPU의 클럭 스피드는 6 MHz였으니 최소 1000배는 빨라졌다고 할 수 있다.
아, 이런. 벌써 2022년 1월이 다 갔네. 그래, 시간은 상대적인 거다. 상대성이론을 잘 모른다 해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다. 그러니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주는 건축의 마법은 70세의 거장(1941년 생인 다다오가 2011년 지었다고 한다)의 선물이다. 빠른 시간을 느리게 붙잡아 놓기. "자,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장소로 바로 이동할게요" 한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도슨트의 마음이 급하다. 걸음을 옮기자. 미술관 내부 건물로 들어섰다.
"건축물 내의 모든 노출 콘크리트의 거푸집은 모두 폭이 180cm입니다. 그리고 바닥을 보시면 타일은 모두 90cm, 그래서 노출 콘크리트의 단면이 만나는 선과 바닥의 타일 눈금선이 모두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있어요" 도슨트의 설명에는 빠졌지만 눈길을 돌려 창문을 보니 유리창 한 장 한 장의 폭도 90cm, 타일과 그리드가 딱 맞아떨어진다. 건축가는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도면 위에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는 사람이다. 직접 벽돌을 쌓고 톱질을 하진 않는다. 노출 콘크리트의 벽면이 이렇게 균일하게, 매끈하게 나오게 만드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게 또 이어지는 바닥, 천장과 경계선이 딱딱 맞아떨어지게 만든다는 건 더더욱 험난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완벽한 창조물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과 일을 하는 건 대개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야말로 "미친놈"소리를 수없이 들어가며 강박증에 가까운 (아니 그냥 심한 강박증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완벽주의를 보여줬다. 성공한 CEO들 중에 유난히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구글링을 조금만 해보면 이 주제로 이루어진 아카데믹한 연구들도 꽤 많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성공)를 위해서라면 주위 사람들의 괴로움은 안중에 없다면 그래, 소시오패스가 맞다. 안도 다다오도? 그러고 보니 완벽하게 다듬어진 콘크리트 덩어리의 단면은 스치면 금방이라도 손이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다가온다.
도슨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콘크리트 단면이 직선으로 딱 떨어지게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도 다다오가 모서리면을 이렇게 갈아내자고 했다고 해요. 날이 선 듯 완벽한 콘크리트 모서리를 만들어내고 뿌듯해하던 공사 현장의 사람들이 이걸 다시 갈아내야 한다고 하니 많이 실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도 다다오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데요, 그래서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거랍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배려를 연기'할 줄 아는 소시오패스였을까? 종종걸음으로 지나쳤을 모퉁이에서 '완벽한 아름다움'과 '아이들의 미소' 사이에서 노장의 건축가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여기까지 큐레이터 OOO였습니다. 남은 시간 좋은 관람 되길 바라며..." 감사합니다. 다들 박수, 짝짝짝. 한 시간에 걸친 도슨트 투어가 끝났다. 제대로 했으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코스라고 한다. 하긴 4시간짜리 도슨트 투어를 따라다닐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뭐든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목표를 이뤄내는 민족이니까. 어떤 분야든 학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는 '단기 속성" 코스 아닌가? 박물관 정원으로 나왔다. 제임스 터렐관 관람 예약시간까지는 30분 남짓 남았다. 춥다. 외투를 차에 두고 나와서 후드티 차림으로 산책을 하자니 따뜻한 햇살의 지원을 받아도 아직 1월 하순, 원주 치악산의 바람은 차다. 다시 돌아가 미술관을 보기에도 어중간하고 딱히 할 게 없다. 조각품들이 있는 미술관 정원을 천천히 걷는다. 철학도 그렇지만 미술 감상도 결국 걷기다. 걷는 속도와 작품 앞에 머무는 시간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다. 오래전, 그러니까 BC 십 수년 전 (여기서 BC는 Before Corona다. 우리가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처럼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등 떠밀려 무빙워크라도 탄 것처럼 자동으로 이동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곁눈질로 쓰윽 스쳐가며 보았으면 거기에 존재조차 하는지도 몰랐을 작품이 오랜 시간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미술관도, 세상도 멈추어 바라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외모도 성격도 둥글둥글해지고 부드러워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더 날카로워지는 사람이 있다. 고집도 세진다. '외모와 머리(이성)는 샤프해지고, 가슴(감성)과 마음은 넉넉해지면' 제일 좋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외모도 성격도 둥글둥글하게 나이 드는 사람이 더 좋다. 쏜살 같이 날아가는 시간과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따라가기 조차 어려운 속도로 앞으로 달려가는 세상과 맞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칼을 갈며 날을 세우는 사람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