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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05. 2020

여행은 꿈꿔왔던 환상을 모두 이뤄주진 않는다

외로움과 고독보단, 웃음과 잠을 채워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시베리아를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모스카바까지 일주일 간, 도시 별로 내리지 않고 기차 그대로 즐기기 위해 시베리아 열차를 타는 많은 청춘들은 꿈에 부풀어 있다. 기차 안에서의 일주일이 본인의 인생에서 최고의 멋진 외로움과 고독, 미래와 과거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해 주리라고. 덜컹대는 기차 창 옆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생각이 퍼뜩! 떠오를 것이라 믿는다. 아니 정말 그것을 느낀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뉴질랜드의 회사에서의 일을 마치고, 런던의 회사로 이동을 하는 이동 편으로 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택했다. 이유는 세 가지. 금전적 이유와 목표 여행지에 딱 맞는 동선, 무엇보다 시베리아 열차 그 자체의 로망. 뉴질랜드에서 뉴칼레도니아, 피지를 거치며 호화로운 허니문 아일랜드 투어를 혼자 당당히 마친 나는(당당하며 외로운) 돈보단 시간이 많은 청춘이었다. 어차피 다시 아시아를 거쳐 유럽을 가야 한다면 몽골을 거치고 싶었고, 당연히 비행기보단 기차가 저렴했다. 그래서 다들 타는 블라디보스토크발 시베리아 열차를 타지 않고, 몽골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가는 트랜스 몽골리안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랐다. 그 누구나 꿈꾸듯, 시베리아 열차에 타면 삶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어서.

수많은 백팩 청년들의 꿈, 시베리아 횡단 열차

    하지만 고독은, 내 성격상 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고독을 위해 어쩌면 그냥 깊은 산속에 혼자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일주일 정도 있다 오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이 통로가 오픈된 최하등급 열차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게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같은 칸의 착한 한국인 친구들 덕에 굶지 않고 일주일을 버티고, 옆 칸까지 건너가 일본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밤 지새우던 주제에 무슨. 거기에 열차는 길게는 열 시간 이상, 혹은 두어 시간에 한번 정차하고, 정든 친구를 보내고 새로운 승객을 태운다. 딸을 만나러 3일간 열차를 타는 할머니, 이틀의 거리를 건너 아빠를 만나러 가는 어린 공주와 그녀의 어머니, 발 냄새 풀풀 코골이 쿨쿨 우락부락 아저씨들까지. 그들을 반기고, 음식을 나눠 먹고(내 행색이 어찌나 초라했는지 주로 다양한 러시아 간식을 얻어먹었다.), 옆 침대에서 잠들다 또 인사하며 떠나보낸다. 나는 러시아어가 안되고 그들은 영어가 안되니 손짓 발짓, 구글 번역기 써가며 또 안 통하면 그냥 씩 웃으며 소통한다. 


    이따금 그들이 우르르 떠나가는 역에 정차할 때야 말로 시베리아 열차 최하등급 수용자들의 유일한 해방구다. 몇 분간 정차할지 확실히 체크하고 득달같이 달려 나가 찌뿌둥한 온몸을 스트레칭한다. 지도상으로는 어디인지도 모를 시베리아 한복판의 공기를 급하게 들이마신다. 열차 창을 통해서만 보던 9월 가을의 붉고 노오란 풍경을 온몸으로 담는다. 그리고는 생존을 위한 짧고 굵은 쇼핑을 시작한다. 시베리아 열차가 멈춰 설 때면 열차 근처로 많은 아줌마 보따리상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만들고 구해온 음식들을 들고 달려온다. 그러면 그녀들이 들고 있는 다양한 지역 음식을 기웃기웃하며 두어 개 챙긴다. (맛 성공률은 극히 낮다. 지역 특성이 강해 입에 안 맞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제 제일 중요한 의식, 자그마한 매점을 찾는다. 매점에는 주로 공산품이 구비되어있어, 과자나 음료수 등 성공확률이 높은 간식들을 사고 ‘도시락’라면을 충분히 구비한다. 그리고 이쪽저쪽 눈치를 본 후, 매점 아줌마에게 마법의 단어를 속삭인다. ‘피보?(пиво)’


    대번에 매점 아줌마의 눈빛이 바뀐다. 아줌마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평도 안될 법한 작은 매점 안 가판대 아래로 손을 슬쩍 집어넣는다. 그녀의 손에 3이나 7이 새겨진 맥주 캔이 슬쩍 올라온다. 기쁨으로 눈이 돌아간 나는 한 손의 손가락은 다섯 개니까, 그 손가락 전부 크게 펼친다. 숨겨진 냉장고에서 시원한 5개의 맥주 캔이 검은 봉지에 두 번이나 쌓여 올라온다. 여느 느와르 영화에서나 나오는 밀거래 현장처럼, 조용히 물건과 돈은 오고 가고 거래자들은 만족한 미소를 띠며 서로의 안녕을 빈다. 미리 구매한 음식과 시커먼 봉지를 들고 후다닥 열차에 오르면, 열차장 아저씨가 굳은 얼굴로 혀를 쯧쯧 찬다. 열차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혼났지만, 며칠이 지나며 과자도 차도 나눠 먹고 마시며 정들어 묵인해주는 착한 공범 아저씨.

러시아 어른들은 남녀불문 미소에 짠 편이다. 미소가 그들의 따듯함을 모두 설명할 수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시베리아 열차 내에서는 식당칸을 제외하곤 금주다. 당연히 정차하는 역마다 보이는 작은 매점에서의 술 판매도 금지다. 하지만 불곰국의 시민들은 개의치 않지. 열차 내에서 보드카를 들이붓는 아저씨들과 금주령 시대의 미국처럼 술을 밀매하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정겨운 무법지대는 없을 법하다. 그런 매점에서는 주로 발티카 맥주 3과 7이 많이 보인다.


    러시아의 국민 맥주인 발티카는 발티카 0에서 발티카 9까지 10가지의 다양한 맥주 종류를 자랑한다. 캔이나 병에 적힌 브랜드 숫자에 따라 무알콜 맥주, 흑맥주, 라거 맥주, 밀맥주 등 다른 맛과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필스너 맥주인 3번과 엑스포트 라거 맥주인 7번이 러시아 곳곳 매점이나 레스토랑 어디에서나 보이며, 마트에서 다른 번호들도 구매할 수 있다. 번호별로 마셔보며 취향을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는 그 맥주 중에서도 도수가 제일 높은, 소맥 같은 느낌의 맛이 나는 발티카 9를 즐겨 마셨다.

붉은 광장에 서면 붉은 발티카 9가 땡기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식당칸에서 맥주를 홀짝 대다가 같은 칸의 친구들과 이것저것 나눠 먹으며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 할 일이 없을 땐 내리 자버리면 어느새 열차는 목적지에 점차 가까워진다. 좁은 열차칸 안에서 아무런 준비와 의도도 없는, 제대로 된 소통조차 없는, 순수하기 그지없는 만남과 헤어짐이 빠르게 구성되고 해체된다. 꿈꿔왔던 고독과 외로움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내 멋대로 여행이 남았다. 여행 전에 적어 둔 버킷리스트가 많았던 만큼 벌써 이뤄낸 목표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내 여행은 이처럼 목적지에 도착했을지언정 꿈꿔왔던 그림들이 이뤄진 적은 많지 않다. 그러면 어떠랴. 긴 여행에서 내 작은 그림 하나 그려가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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