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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취객 May 22. 2020

캐리어 하나의 삶

노마드의 짐 줄이기

    이사를 자주 다녔던 어렸을 때 이사는 매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온 가족 다섯명이 달라붙어 이삿짐 센터의 전문가 분들과 함께 하면 어느새 후다닥 물건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하지만 정작 제일 게으른 막내의 불만은 항상 너무 많은 짐이었다. 냉동고, 냉장고를 열면 가득 차 있어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머니와 누나들의 옷장은 계절별로 다양한 옷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다섯 대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던 어머니의 냉장고, 명품도 잘 사지 않고 한국의 사계절을 보내야했던 어머니의 옷장이었지만 어린 나는 항상 어머니에게 불만이었다. 정리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한다고.


    이제 나는 빠르면 6개월, 길면 1년반이면 이사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도시를 옮기는 이동도 아니고, 국가 혹은 대륙을 이동한다. 애초에 자취 생활을 오래 할 때도 짐이 정말 없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불가항력으로 짐을 최소화하며 살고 있다. 캐리어 하나. 큰 가방 하나. 내가 다른 국가로 이동을 할 때 가지고 가는 짐이다. 가방에는 핸드폰과 노트북, 노트, 몇 권의 책, 중요하지만 무거운 물건들. 옷은 비 올 때 자주 입는 방수 바람막이, 두툼한 코트, 아우터 두어 개, 긴 청바지 또 두어 개. 여름 용 짧은 티셔츠와 반바지, 운동과 실내용 옷가지 몇 개, 속옷과 운동화. 이정도면 충분하다. 어디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과 비슷한 짐이다.


    물론 이런 무소유에 가까운 삶은 여러 제반사항이 있기에 가능했다. 제일 큰 것은 역시 한국에 있는 가족. 내가 이동을 할 때, 몇 달 뒤 새로운 곳에서 만날 때쯤 내게 필요한 한국 조미료나 옷가지들을 지원해준다. 또 내가 세계 곳곳에서 모은 술 미니어쳐나 책들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집 창고 한 구석으로 들어간다. (이 점에서 이미 가족에게 발언권을 크게 잃는다.) 또 호텔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이동이 쉬운 점도 있다.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유니폼을 입어야 하기에 다양한 수트가 필요 없고, 때론 호텔에서 활용 가치를 잃은 물품들을 지원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살았던 공간들이 주로 쉐어하우스, 플랏, 룸메이트와 같은 공유 공간들이었다. 냉장고, 주방기구, 책상, 침대 등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돈도 절약, 짐도 절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어느 곳에 정착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 노마드적 삶의 방식은 쉽게 버려지지 않을 것 같다. 미니멀 라이프는 꽤나 불편하지만 또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다. 내 경우에는 세 가지 철칙과 그를 가능케한 내 세 가지 단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첫째, 사고 싶은 것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 두고 나중에 구매한다. 수 차례 글 들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정말 게으르다. 게다가 쉽게 까먹기까지 한다. 이 치명적인 단점은 충동구매에게는 굉장히 효과 있는 약이다. 너무 게을러서 국가를 이동할 때마다 그 편한 아마존이나 인터넷 구매 서비스를 가입조차 안 했고, 그 누구보다 먼저 사고 싶었던 게임기도 결국 구매 못했다. 사고 싶다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핸드폰에 적어 두면, 그 노트를 쓴 것을 까먹어서 구매하지 않는다. 그럼 결국 그 물건들은 그렇게까지 필요했던 것이 아니였던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매 못한 리스트는 닌텐도 스위치, 새 자켓, 중화식 웍 등 종류도 다양하다. 결국 구매하지 않았다.


    둘째, 조금 비싸더라도 빠르게 소비할 수 있을 만큼 구매한다. 이는 주로 식재료나 생활 용품에 해당되는데, 오랜 자취 생활로 터득했다. 나는 음식은 자고로 갓 해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밥도 방금해서 따듯해야 하고, 반찬도 오래 묵힌 것은 딱 질색한다. 밥을 차려주는 어머니나 혹 결혼하면 생길 파트너에게는 정말 귀찮은 사람이겠지만 나는 그래서 내가 직접 해먹으니까 할 말은 있다. 그래서 야채도, 고기도, 식재료도 쓸 만큼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 구매한다. 세제나 세면도구 같은 생활 용품도 마찬가지다. 소량 구매는 비싸게 느껴지지만 되려, 많이 구매했다가 시간이 지나 버려지는 양을 생각하면 가격은 크게 차이 없다.


    셋째, 쉽게 버린다. 제일 중요하다. 나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단점을 가진 사람이라서, 언젠가는 필요할 수도 있는 물건들을 쉽게 버려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아직은 괜찮은 운동화도, 다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었던 책들도, 한국 집에선 평생 썼을 수건들도 미련없이 버리거나 기증하고 이동했다. 옷도 1년이 지나도 한 번도 입지 않았다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겨울 옷은 이번 겨울에 단 한 번도 옷장에서 빼지 않고 다음 겨울에도 또 건드리지 않았다면,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것이 맞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아깝고, 낭비일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쉽게 구매하지 않는 편이다. 또 적게 가지고 그 역할을 다할 때까지 끝까지 쓴다.

'

    다음주에, 아니 당장 내일 다른 나라로 이동해야 할지라도 나는 금방 또 캐리어 하나의 삶을 쉽게 이어갈 것이다. 물론 정착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좋은 물건을 사서 아끼고 오래 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 대가족에게는 그에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 미리 구비해 놓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또, 화장품이나 의류 등 기본 물품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나 직종에 일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가 크게 와 닿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쓰지도 않는 짐들에 파묻히고, 냉장고에서 음식들이 썩어 역한 냄새를 풍길 때는 우선 버려야 한다. 끝까지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도, 버리지 못하는 미련도, 전부 쓰레기 봉지에 담아 떠나 보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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