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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i Kim Jan 14. 2021

잡지의 맛

컨셉진! 여전히 있어 줘서 고마워

오늘은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려야 할 곳보다 세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길이지만, 꼭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한 주가 시작된 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난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 침대에 발랑 눕거나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건 육체의 노곤함을 풀어주는 일이지 진짜 힐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점에 꼭 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어떤 생각 하나가 꿀 발라놓은 단지처럼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2016년, 경력이라곤 신문사 인턴이 고작이던 난 매거진 컨셉진 에디터에 지원했다. 하루를 온전히 바쳐 과제를 수행하고 기대를 한아름 안고서 서류 제출을 눌렀지만, 합격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슨 패기였는지, 나는 페이스북 메시지로 컨셉진 대표님께 '서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보냈다. 기다려 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보기 좋게 떨어졌던 게 분명한데,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놓지 않았다.


뭐, 스물네 살이었으니까. 작은 것 하나도 부풀려 생각하고 마음이 널뛰던 때다.


그 뒤 뉴미디어 스타트업 에디터로, 엔터테인먼트 기획자이자 프리랜서 에디터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컨셉진을 떠올렸다. 때로는 구입해 출퇴근길을 동행했고, 때로는 서점에 진열된 모습에 반가운 마음으로 돌아보았고, 때로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피드로 생존을 확인했다.


특히 서점 매대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면 나의 패기 넘치던 그때가 떠올라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저 작은 몸집으로, 10년째 건재하게 세상에 나와줘서 고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해야 할 일과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욕심에 치여 있던 오늘, 모처럼 컨셉진 생각이 반짝 났다. 컨셉진을 사고, 곁들이기에 더없이 좋은 잡지 한 권과 소설책 한 권을 덤으로 집었다. 집에 돌아와 시리얼과 함께 읽고 있자니, 벌써 4년 전 이 잡지를 처음 발견하고 읽으며 심장이 쿵쿵 뛰던 때가 새록새록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당시의 난 거의 목욕탕에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였다. '여기에 실린 콘텐츠들처럼 다양한 문화 예술계의 사람들을 만나고 소개하는 일, 꼭 해보고 싶어.' 그때는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던 때다. 나를 이토록 잘 표현하고 담아낼 매체는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극히 1인칭 시점이었다.


4년이 조금 지난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평일도 주말과 휴일처럼 특별하게 보낼 수 있다고 믿는 나의 가치관과 일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이 잡지의 교집합이 먼저 보인다. 그래서 나를 똑 떨어뜨린 곳이지만 얄밉지가 않다. 오히려 사회생활에 부딪쳐 마음이 다쳤을 때, 그저 조용히 쉬고만 싶을 때 먼저 생각이 난다. 언젠가는 컨셉진과 일을 해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도 깃든다.



우리나라는 유독 콘텐츠에 값을 지불하는 것에 인식이 박하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은 넷플릭스 같은 서비스 덕분에 영상 콘텐츠의 가치가 제법 올라갔고, 책을 읽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독서가 핵심인 교양 프로그램도 유튜브 바람을 타고 많아지고 있고. 하지만 여전히 잡지는 '영원한 사양산업 굴레'의 최전선에 있는 것 같다. 내 주변 사람은 가장 돈 쓰기 아까운 게 잡지라는 뼈아픈 소리도 한다.


하지만 굴레라는 단어를 잘 살펴보면, 어딘가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이 들린다. 바닥으로 꺼질 것 같지만 결코 침수하지 않는 것. 마니아층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성장하는 콘텐츠. 그게 바로 잡지의 힘이고 맛이 아닐까.


잡지의 묘미는 하나 더 있다. 읽고 나면 까먹지만, 그래서 돈을 내고 사기 아깝다는 말이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읽는 순간엔 감성지수가 무한정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내가 언제 이렇게 촉촉한 사람이었지, 싶을 만큼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몇 년 전 읽은 잡지 속 인터뷰이의 한 마디가 문득 머리를 때릴 때도 있다.


컨셉진은 그런 잡지다. 사람 사는 이야기, 어느 대표가 회사를 나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듬뿍 들어간 사업을 차린 이야기, 구독자 1000명을 가진 유튜버 할머니의 성장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나는 노마드 독자가 된 듯하다. 잡지에 실린 콘텐츠를 타고 전 세계 곳곳을, 타인의 삶 방방곡곡을 여행한다.


정형화되고 규율화된 삶을 조금씩 부서뜨려주는 펜치 같은 것. 나에게 잡지는 이런 역할을 한다. 한순간의 감정일지라도,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자유로운 울렁거림을 준다.


내 스물아홉은 그 전해보다 좀 더 힘들고 팍팍해질 것 같다. 아무래도 잡지 구매는 더 늘어날 모양새니, 잔고를 두둑이 준비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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