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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지금이라도 해?(2)

<기적을 부탁해> 리얼리즘 난임극복소설

by 이소정

[회사 도착. 지각 안 했음.]


1교시 쉬는 시간이 시작될 즈음에 준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화해를 하자는 뜻인 줄은 알지만, 은설은 전처럼 선뜻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답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서랍 깊숙한 곳에 박아두고 은설은 종일 휴대전화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소심한 복수였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았다. 퇴근을 앞두고 다시 꺼내든 휴대전화에는 준수의 메시지가 몇 통 더 와 있었다.


[답장 안 하네. 마누라 혹시 지금 복수중인 건가···]

[연락두절 됐던 건 미안해요. 근데 연락 없으면 보통은 아무 일 없는 거야. 뭔 일 있었으면 연락이 갔겠지. 병원에서든 경찰서에서든.]

[안 피곤해? 마누라 잠 한숨 못 자고 출근했던 거 같아서 걱정되네.]

[오늘은 꼭 11시까지는 집에 들어갈게.]


은설은 그제야 준수에게 답신을 보냈다.


[바빠서 휴대전화 챙겨볼 시간이 없었어.]


10분쯤 지나자 준수에게서 답신이 왔다.


[힘들었겠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저녁 먹고 바로 잠을 좀 자둬. 내가 도착해서 깨워줄게.]

[상황 봐서]


최대한 짧고 간결한 답신으로 은설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자신을 마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두 차례 은설의 답신을 받은 준수에게선 더 이상 메시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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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설은 요란히 울리는 알람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밝다.

왜?

휴대전화의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은설은 머리채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뭐야. 7시야 왜...”

옆자리에선 준수가 오래간만에 낮은 소리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미쳤어. 이 사람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그냥 쭉 자버렸나 봐.”

안 그래도 걱정은 하면서 쪽잠을 청하긴 했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운 뒤에 잠깐 자고 일어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심하지 않은 걸 보니, 준수가 10시까지는 들어오겠다던 약속을 지키기는 한 모양이었다. 매일 듣다 보니 코골이 소리만으로도 은설은 준수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많이 피로한 건 아닌지도 알 수가 있었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간만의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준수의 코골이 소리는 명랑했다.

“일어나. 7시야.”

은설이 팔뚝에 원망을 섞어 준수를 힘껏 흔들어 깨웠다.

“응? 아.. 벌써... 더 자고 싶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10시까지 온댔잖아. 10시에 딱 현관문 열고 들어왔지.”

“왜 안 깨웠어? 들어와서 나 깨운다며.”

“깨웠잖아. 기억 안 나? 은설 씨 소파에서 자고 있어서 내가 깨웠는데 자기가 나 거들떠도 안 보고 침대로 직행해서 또 잤잖아.”

“그럼 또 깨웠어야지.”

“오죽 피곤하면 저럴까 싶어서 더 못 깨웠지.”

“깨웠어야지. 그저께 못했으니 어제라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시간은 이미 20여 분이 더 지나있었다.

“머리 감고 출근 준비 하려면 지금도 시간이 모자란데 무슨···”

7시 50분에는 집을 나서야 아침 조회 시간에 늦지 않았다. 깨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린 것은 자기이면서 준수에게 괜한 타박을 한 것 같아 은설은 미안했다. 그리고 되도록 잘 달래어 ‘이틀 뒤’인 오늘 저녁에라도 숙제는 꼭 해야 했다. 목소리를 누그러뜨린 은설이 부탁조의 말투로 준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10시까지 들어올 수 있어?”

“봐서···”

은설의 표정에 섭섭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준수도 자세를 고쳐 잡고 은설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어제 일 다 팽개쳐두고 들어온 거라 오늘 일 진행되는 거 봐야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상황 보고 저녁에 꼭 연락할게.”

“알았어.”




학교에서의 일과는 종일 조용히 지나갔다. 오래간만에 전달사항이 없는 아침이었고, 매번 지각하던 아이도 오늘은 어쩐 일인지 조회시간 전에 들어와 반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아침활력이 중요하다며 단체 기지개를 시키고 시답잖은 농담 한두 마디를 던졌던 은설이지만, 오늘은 마냥 오버액션처럼 느껴졌다. 유난히 차분한 조회시간에 눈치 빠른 아이들은 슬금슬금 은설의 심기를 살폈다.

“얘들아 오늘 내가 컨디션이 꽝인가 보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가던 장난도 막 혼낼지 몰라. 이렇게 말하는 거, 사실 내 기분 때문에 괜히 너희들 잡지는 말자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야. 그렇지만 너희의 배려도 좀 부탁하마.”

“샘, 뭔 일 있으세요? 남편이랑 싸운 거 아녜요?”

“몸살이 오고 있는 것 같느니라.”

“쌤 아프지 마요. 쌤 아프시면 우리만 고생이에요.”

“맞아요. 샘도 보건실에 좀 누워계세요. 좀 쉬면 낫겠죠. 조퇴만 하지 말아 주세요. 부담임샘은 청소를 너무 빡시게 검사해요. 우리 구역 아닌데도 막 시켜요. 누가 환경부쌤 아니랄까 봐.”

아이들의 장난 섞인 걱정반 투정반에 슬쩍 미소를 지었지만 웃음까지는 나지 않았다. 조회시간 내내 가라앉아 있던 심기는 오전이 다 지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은설은 자신의 기분이 왜 그런지 알고 있었다.




배란이 된 것이다.

임신을 준비하면서 몸의 변화에 예민해진 이후로 은설은 배란이 이루어진 이후 자신의 심기가 톤다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준수가 먼저 눈치를 채고 알려준 사실이었다.

“은설 씨는 되게 신기해. 2주 단위로 사람이 좀 바뀌어. 2주는 엄청 발랄하고 착한 화이트 은설이고, 그다음 2주는 농담도 잘 안 받아주고 틱틱거리는 다크 은설이 돼.”

2주 단위라는 준수의 말을 듣자마자 은설은 그것이 배란일을 기점으로 한 자신의 생리전증후군 증상임을 알았다. 그리고 몇 달간의 자가관찰 끝에 미묘한 변화의 기점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한 변화가 배란 직후에 일어나는지 아니면 배란 후 임신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시점에 일어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배란이 일어난 후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 숙제를 한다 해도 임신 가능성은 현저히 낮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틀 뒤 숙제까지 내준 거 아니겠어.’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기분을 은설은 애써 다잡았다.




준수에게선 참참이 메시지가 왔다.


[오예. 어제 내팽개쳐뒀던 일 생각보다 쉽게 해결. 일단 밤샘은 안 해도 될 듯.]

[디자인팀에서 수정본을 넘겨줘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네. 잘못하면 다시 밤샘 각. ㅠ ㅠ]

[디자인팀에서 아직 무소식. 부장님이 열받아서 오늘 다 정시퇴근해 버리자네. 대박]


간만의 정시퇴근에 준수는 몹시 신이 난 듯했다.

‘같이 웃어주어야 화해도 하고 숙제도 할 수 있겠지.’

은설은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여 답신을 적었다.


[축하축하. 오래간만에 좀 쉴 수 있겠네. 저녁에 같이 맛난 거 시켜 먹고 실컷 TV도 보고 그러자.]


갈등은 이렇게 적당히 에두르고 넘겨야 했다. 해야 할 업무를 급한 순서대로 정리하던 은설의 손이 종이 한 귀퉁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하자는 대로 따라줘도 불만뿐인 마누라

VS 자기 아이를 낳는 일임에도 비협조적인 남편>


‘적어보기’는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은설만의 방법이었다. 적어놓은 메모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은설은 메모의 뒷부분을 ‘뜻한 만큼 협조해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남편’으로 바꿔놓았다. 준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쨌든 지금은 은설의 뜻대로 ‘아기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긴 했으니까.

‘그저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어제는 일도 팽개치고 10시까지 들어왔대고. 지금도 일찍 들어올 수 있다고 메시지 보내왔고...’

준수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숙제와 맞물리는 바람에 그저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고 은설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궁극적인 문제는 이런 게 아니었다. 은설은 서로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일’이 다르다는 것이 슬펐다. 은설에게는 ‘더 늦지 않게 아기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고, 준수에겐 ‘더 늦지 않게 자리를 잡는 일’이 중요했다. 따라서, 요 며칠 간의 갈등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고, 해결해 보겠다며 들쑤셔봐야 갈등의 골만 더 깊어질게 뻔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아이 만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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