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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l 16. 2024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



어른들의 사회에서 고립된 아이들


'아이들'과 '새싹'. 이 두 단어는 어색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그런 아이들이 이 영화의 주연이다. 어른들의 보호 아래 마음껏 꿈을 그리고 또 펼쳐나가기도 바쁜 나이. 사랑과 관심, 양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어도주어도 모자랄 것들이다. 이것들이 끊겼다. 이제 우린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힘겹게 이 땅, 이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미약하게나마 살아간다.



아이들에게 허락된 공간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짐짝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엄마가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다거나 시끄럽고 통제가 되지 않아 이웃에게 피해를 준다. 아이들로부터 피해받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이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공간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공간을 향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전철에 엄마와 남자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커다란 분홍 캐리어가 놓여있다. 카메라는 이 캐리어를 클로즈업한다. 캐리어를 쓰다듬는 남자아이의 손길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살아갈 이 공간에서 캐리어가 열린다. 두 개의 캐리어와 두 명의 어린아이. 아직 한 명이 남았다. 남은 한 명의 여자아이는 어둠을 틈타 이 공간에 들어온다. 이렇게 우린 스크린을 통해 네 명의 아이와 만나게 된다.


간신히 캐리어를 벗어나니 이젠 집이 아이들을 가둔다. 이 공간 안에서 이들은 공부도 하고, 빨래도 하고, 놀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게임도 하고, 밥도 먹는다. 이웃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죽은 듯이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공간. 이곳이 바로 아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간이다. 이 제한된 공간에 묻혀 밖으로 나갈 날을 조용히 기다린다.



초록의 자리와 형태


초록은 보통 싱그러움을 자아낸다. 파릇한 것을 보고 있으면 그것참 오래도 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리숙하지만 그런 모습이 순수하게 느껴져 사랑스럽기도 하다. 강인하면서도 연약한 것. 초록 그 자체만으로는 그렇다.


이제 초록이들이 자리 잡은 장소로 시야를 넓혀보자. 힘겹게 꽃을 피워낸 길가의 잡초, 밖에서 주워 온 씨앗으로 피워낸 베란다 정원. 기대했던 싱그러움은 사라진다. 대신 척박한 땅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른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것들, 이 초록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것들은 아이들과 닮아있다. 아이들은 형태만 놓고 보면 새싹, 연둣빛 작게 돋은 이파리이다. 하지만 가파른 절벽 위에 심겨 있기에 싱그러움과 사랑스러움보다 억척스럽고 강인한 생명력이 넘치는 형태에 가깝다.



아이들의 사계


영화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첫 번째 시간은 아이들로부터 만들어진 시간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마음과 어른 없이 삶을 버텨나가는 과정에서 흐른 시간. 우린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가 벗겨진다. 새것 같던 운동화가 낡고 지저분해진다. 짧게 친 머리가 자란다.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상태. 이것이 영화가 아이들의 시간을 담아내는 방식이다.


두 번째 시간은 세상이 가지는 시간.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다시 가을로 접어든다. 계절의 변화는 아이들이 어떤 상태이든 간에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작년과 같은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다. 마치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아이들의 고통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제시간에 맞춰 흐른다.


세상의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며 아이들의 성장을 재촉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도 하고 성장통을 겪기도 한다. 이때의 고통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점점 지쳐간다. 결국 아이들은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점점 뒤처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느리지만 한 발짝씩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매정하고 모진 세상이 지닌 시간과 아이들만의 방향성과 템포로 흘러가는 시간. 이 두 시간의 격차 속에서 아이들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 성장한다.



그럼에도 이 땅에 뿌리내리다


아이들이 자라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부모? 어른? 집? 돈? 예전엔 이 물음에 선뜻 답했었던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니 더는 단순하게 풀리지 않는다. 영화가 이 문제의 숨은 복잡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가장 표면적인 문제는 ‘부모의 부재’이다. 엄마가 떠났고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했던 공간에 남겨졌다. 엄마가 사라지고부터 집은 갈수록 지저분해지고 냄새나는 쓰레기장이 되어간다. 어른스럽던 아키라는 방황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사라짐에 연이어 찾아온 것은 ‘돈의 부재’이다. 돈을 내지 못해 가스도, 물도, 전기도 모두 끊긴다. 당연히 월세도 밀렸다.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한다. 돈의 부재는 계속해서 아이들의 생활을 위협한다. 이것은 아이들을 아이답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엄마의 부재와 동시에 찾아온 비어버린 존재에 대한 공허함. 그리고 엄마를 위해 꿈꿔보지도 못했던 삶에 대한 갈망의 표출. 이러한 내면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 새롭게 마주하게 된 바깥세상과의 마찰. 영화가 점점 상실감과 아픔으로 젖어 들어간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들의 생명력은 강인했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외부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기에 외롭지 않다. 그리고 아픔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그 반대편엔 무덤과도 같던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이 있어 희망적이다. 이젠 좁은 방이 아닌 더 넓은 바깥의 공기를 마신다. 함께 있어 주는 존재와 더 넓어진 세계 덕분에 아이들이 전과는 다른 미소를 짓게 된다. 이러한 햇빛을 향한 아이들의 힘겨운 고갯짓에, 미약하게나마 이 땅에 뿌리 내리는 모습에 미안하게도 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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