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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Jul 23. 2024

칠드런 액트

리처드 에어 감독의 칠드런 액트(2017)


판사라는 신


판사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따뜻함보다는 차가움이, 인간적이기보다는 비인간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냉철하고 딱딱한 그들은 도덕보다는 법을 잣대로 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들은 “누군가의 삶”에 깊이 개입하기보다는 눈앞에 던져진 “사건”에만 집중한다.


메이는 판사다. 이 영화에서의 판사는 결정권자라는 측면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권위자이자 결정권자인 그녀는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로 사람들이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 최선의 답을 골라 건네준다. 또한 법정에서의 그녀는 자애롭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에 진지한 태도로 임한다. 자기 일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집중한다. 뿐인가. 그녀는 존경받는다. (판결에 대한 기사, 몇몇 여론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녀 주변의 법정 관련 이들은 그녀에게 예우를 다한다.


앞서 판사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를 언급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영화가 보여주는 메이라는 판사의 이미지도 언급했다. 전자는 직업,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후자는 그녀를 최고결정권자이자 인간이 더 이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는 “신”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했다. 영화는 메이를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 뒤에는 자꾸만 신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무거운 어른


메이에게서 신의 이미지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른”으로서의 이미지도 강조되어있다. 그중에서도 일에 대한 책임감, 아이에 대한 책임감 등과 같은 여러 책임감으로 둘러싸인 모습이나 앞선 경험으로 인해 무디고 무뎌진 감정이 만들어낸 평온함, 느긋함과 같은 호수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어른은 무겁고 안정적이다. 어른이라는 표현이 향하는 대상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편안하다. 가변적인 것들은 늘 긴장하게 만들지만, 불변의 것들은 언제고 지금과 같은 모습이기에 불안을 잠재운다. 물론 자극이 고통과 함께 쾌락을 선사하기도 한다. 해서 변화를, 자극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안정적이길 꿈꾼다. 늘 불안에 떨기보다는, 늘 예민한 상태에 놓이기보다는 내가 편안했으면 한다. 나의 인생 전반은 아니더라도 어디 한 군데만이라도 안정적인 기반에 가 닿아있길 바란다. 그래서 우린 어른이 되길 바라거나 혹은 나의 곁에 어른이 있길 바란다.


애덤에게 유난히 감정이입을 했다면 그리고 영화가 따듯하게 느껴졌다면 아마도 메이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자신이 안정감 있는 어른이길 바라는 마음이, 그런 어른이 곁에서 안정감을 불어넣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도 어른도 아닌 그냥 사람


18살을 기준으로 아이와 어른이 갈린다. 법은 우리가 여태 살아온 날을 통해 당신의 선택이 어른스러운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네 실제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나이만으로는 우리의 어른스러움을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사고와 행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이성적인 생각과 태도는 처한 상황, 현재의 심리상태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다.


메이는 어떨 때는 권위자로서, 어른으로서 여유로운 판단력을 보인다. 또 어떨 때는 외부 자극(남편의 외도, 애덤의 말과 행동)에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마는, 견고하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명확한 기준으로 절대적인 어른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로 메이는 완벽한, 이상적인 어른이라 말하기 어렵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지한 인간과는 달리 선택의 문제에 늘 최선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신은 자애롭기에 나의 결점, 잘못을 알면서도 사랑으로 나를 포용해준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길이 더 나은 길로 향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신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애덤은 메이가 자신의 새로운 신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아직 무지한 자신을 앎의 세계로 인도해주길 원하고 올바르지 못한 판단력으로 잘못된 길에 빠지기 전에 그녀가 옳은 길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자신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길 바란다. 그러나 메이는 신이 아니다. 그녀 또한 흔들리는 사람이다.



결국 선택에 관하여


영화는 메이를 다채롭게 그려냈다. 신, 어른, 판사 그리고 상처에 크게 반응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 그런 메이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문제를 놓고 선택을 내린다.


애덤은 신이자 어른이자 판사인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통해 자신이 꿈꾼 명예로운 죽음이 사실은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게 된 이 소년은 그녀가 앞으로도 자신의 선택 문제에 개입해주길 바란다. 자신은 열등한 선택을 할 뿐이며 그녀만이 더 나은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듯이.


영화 속 인물은 “선택”을 기준으로 설명 수 있다. 선택의 법적 권한을 가진 사람, 선택의 권한이 없어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 선택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 누군가에게 자신의 선택권을 넘기고 싶은 사람. 그리고 영화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 행위를 보여준다. 또한 완벽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이가 없단 사실도 보여준다.


애덤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직접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자유로워진다. 권위자라서, 신의 면모를 보인다 해서, 경험이 많은 어른이라서 나보다 나은 선택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나의 힘으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내가 져야만 한다. 애덤이 얻게 된 자유는 죽음으로 이룩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타인의 힘이 아닌 그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측면에서는 조금은 그가 자유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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