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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y 05. 2024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영화의 중심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영화가 복지 문제에서 시작하여 영국 복지시스템의 고발로 끝났다. 그땐 그저 복지 하나만을 담고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두 번째는 좀 달랐다. 영화의 종착지를 알고 봤기에 여유가 생겼나 보다. 그 여유에서 발견된 건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그리고 그들과 복지 사이의 관계.


그러고 보면 영화가 초점은 정말 잘 잡았구나 싶다. 복지가 사람을 위한 것인데 정작 이를 필요로하는 사람이 복지 혜택을 받는 데 애를 먹지 않나, 어떤 도움이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며, 제때 도움을 받지도 못한다. 가까워야 할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에겐 너무나 멀리 있다. 이런 문제점을 잘 보여주기 위해선 '복지'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복지란 무엇?


처음 이 영화로 토론했을 때가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당시 나에게 있어 복지는 '소외층을 돕는 것'이었다. 소외된 자만을 위해 움직이며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 소외된 이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결국엔 돌고 돌아 우리도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론 불필요해 보일지라도 미래를 내다봤을 땐 필요한 것. 하지만 본심은 복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내가 얻게 될 주변의 긍정적인 시선과 힘든 삶을 사는 이를 도울 때 얻을 수 있는 우월감을 위한 것. 그런 위선적인 행동이 내가 체감한 복지였다. 복지의 일부만 알던 시절, 잘 모르던 시절엔 그랬다.


사실 아직도 복지는 잘 모르겠다. 복지에 대해 한참 설명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뜬구름 같기만 하다. 그래도 이젠 복지의 개념이나 대상, 목적이 이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음은 안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선뜻 예라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복지인지, 누가 어떤 형태로 복지를 받고 있는지를 모르니 어떤 게 필요한지도, 어떤 게 불필요한지도 알기가 어렵다. 게다가 내가 그 적용 범위에 들지 않는다면 해당 요소의 필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도 어렵다. 그래서 쉬이 답하기 어렵다.



다니엘 블레이크인 이유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 엇나간 타인의 행동을 보면 쉽게 분노하던 심술궂은 이웃 영감님에서 힘든 삶을 사는 가족을 돕는 인정 많은 할아버지로 변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와 동시에 복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힘없는 개인이기도 하다.


나의 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복지 문제를 고발하려면 처음부터 약하고 초라한 인물을 내세우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 왜 드세고 약간의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인물에서 출발하였을까. 감독은 다니엘 블레이크를 내세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 왜 하필 다니엘 블레이크, 이 고집불통 영감이었나.


어쩌면 답은 정말 간단할 수 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서 그에게 다니엘 블레이크란 이름을 부여한다. 그런 다음 다른 것들은 최대한 덜어내고 이 너무나 익숙한 영감이 복지라는 것을 놓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그 자체를 관찰한 것일 뿐이며 그 외 다른 의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복지라는 게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지원을 받는 이는 공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나의 착각 때문에 이런 혼란에 빠졌나 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복지의 적정거리


복지가 복지사라는 인간에 의해 전달될 때 어떤 형태로 다가와야 하는가. 솔직히 영화에서 보이는 복지사들을 아니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센터를 찾는 이들은 삶의 여유가 없는,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화라는 것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상태이다. 이런 화에 차 있는 사람을 매일같이 대하는 사람들이라고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그래서 복지사들은 이 성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정은 뒤로하고 기계적으로 딱딱하게만 굴었던 게 아닐까. 역시 복지를 사이에 둔 이들 간의 적정거리는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는 게 서로를 위해 좋지 않을까 싶다.



정이란 연결고리, 그것의 적정무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지닌 문제들은 국가, 도시가 제공하는 복지만으로 해결 가능한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요즘 다시 보고 있다. 불행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체념적인 삶을 살던 손녀 가장 지안이 불쌍한 부장 동훈에 의해 조금씩 변화되어간다. 불쌍한 인간이 불쌍한 인간을 이해하고 의지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케이티도, 다니엘도 서로가 함께했기에 영화를 보면서 답답한 한편으로 채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중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류애'를 드는 영화들이 있다. 사람 간의 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결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도, 나의 아저씨도 좋게 보였던 가장 큰 이유는 진심으로 서로의 힘든 점을 공감할 수 있는 인물끼리 만났다는 점, 서로의 인생에 대한 책임 의식이 아닌 그저 돕는 행위에서, 공감하는 마음에서 그친다는 점 때문이다. 각자를 독립된 인간으로 남겨둠과 동시에 동질감이란 연결고리로 이어진, 그들 사이에 느껴지는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거리감이 적당해서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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