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온 Feb 17. 2024

그래서 지금 나는 정확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나의 옛 정의를 추억하며


나의 첫 정의는 나, 그 자체였다. 옳고 그름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 후로는 내 결정이 곧 법이었다. 내 마음에 들면 그것은 정의고 마음에 들지 못한 것들은 악으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난 겉으로 티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나의 판단에 꽤 자신하였다. 내 생각에 난 그리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내린 결정은 나름 열심히 고민한 끝에 얻은 결과였다. 그러하기에 그것들은 결코 섣부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제 지난날의 내가 정의 그 자체일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내가 아는 세상은 상당히 협소했다. 복잡한 실제의 세상과는 달리 좁다란 세상 안에서는 많은 것이 가능하다. 모든 상황에 딱 들어맞는 정의를 발견하는 일이라거나 그런 올바르고 적절한 정의를 발견해 낸 위대한 사람이 (적어도 내 세상 안에서만큼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이라거나. 스스로 부여한 위대함에 취해 흐릿해진 눈으로 내 손에서 탄생한 이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질서정연한 정의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다른 것은 담지 않고 그저 나의 정의론만 그렇게나 오랜 시간 소중히 내 눈 안에 간직해왔다. 보이는 게 나의 정의뿐이었기에 내 말이 매번 정당화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팁은 다혈질적 기질에 있다. 욱하는 성격은 모든 말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나의 분노는 상당히 견고하기 때문에 나와 다른 모든 말들을 철저히 배척할 수 있게, 내 생각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분노, 이 감정은 나와 다른 말을 꺼내는 악인으로 인해 발화되어 그의 모든 것을 단일한 색으로 덮어버린다. 나와 다른 말이 본디 지니고 있었을 다채로움을 지우고 내 눈에 띈 단 하나의 색으로 덧칠함으로써 그 악인의 주장을 단조롭게 그리고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그 정의롭지 못한 악인의 주장이 한층 단조롭게, 편협하게, 무력하게 변질되고 나면 난 그제야 그의 주장을 향해 안전하고 자유로운 격분을 마음껏 쏟아낼 수 있게 된다.



흔들림 속에서도 꺼지진 않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것을 접하게 된다. 내 세상의 지평선이, 나를 외부의 사고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던 그 경계선이 나란 중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점차 넓어지는 나의 영역에는 전과 달리 다양한 것들로 채워진다. 이렇게 채워진 다양성 아래 난 유례없는 큰 폭의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이 격변의 시기, 이 불안정한 시기에 맹렬히 부르짖던 나의 어리숙한 정의론은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의 눈은 종종 싫어하고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담을 때가 있다. 격변의 시기 속에서도 나의 눈, 싫은 것을 향해 한껏 날을 세우는 나의 이 눈은 제 할 일을 아주 열심히 수행했고 이로 인해 나의 정의론은 더욱 빠른 속도로 파멸되어 갔다. 나의 눈이 불편함에 한껏 예민해진 때가 오면 나는 그제야 타인의 불편함 속에서 비로소 나의 지난 과오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결점을 내게서 포착한 순간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내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나만큼은 무결한 존재여야만 한다는 마음이 과거의 그릇된 정의를 외면하게 했다. 나의 틀린 판단을 비웃는 자 앞에서 내가 느끼게 될 수치심과 정확하지 못한 판단 때문에 나의 가치가 떨어질까 염려하는 마음에 정의를 정의하는 것마저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나의 눈은 아름답다 느껴지는 것들 또한 담는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이 글 속의 모든 정의가 그렇게 담겼다. 더 옳은 것, 더 적당한 것의 여부를 떠나서 정의라는 모호한 것, 절대적으로 딱 맞아떨어지기 어렵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로부터는 비난받을 위협이 있는 이것을 철저히 파헤치고 구체화하고 다듬어 마침내 내 앞에 놓고 간 이들과 이들의 주장이 내 눈 속에 그렇게 담겼다. 이들의 아름다움과 나의 조악함이 나란히 놓인 순간, 이들의 영광과 나의 실패가 극명히 대비되는 바로 이 순간 오히려 나의 정의는 다시 한번 살아보고자, 정확해지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보고자, 이들처럼 아름다워져 보고자 다시금 불씨를 지핀다. 좌절하기는커녕 이들처럼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들끓는다. 어쩌면 정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절대 꺼질 수 없는 불길이기 때문에, 모두의 소망이기에 수치심 앞에 꺼져가던 나의 정의론도 다시 불을 밝히려 일렁이고 있는 게 아닐까.



정의를 정확히 정의하고자 하는 마음


오늘 나와 함께하고 있는 정의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정확한 사람이 되고픈 나의 열망이 내면의 많은 영역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정확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목적론을 택한 것이다. 오늘의 난 내가 원하는 가치, 내가 획득하고자 하는 이상을 다른 이들 앞에서도 당당히 꺼내 들 수 있도록 나의 목적을 최대한 자세히 들여다보고 필요한 것을 정확히, 세밀하게 짚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이 지닌 이야기를 통해 내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며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적절하고 정당한 방법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무조건 내가 옳기만 했던 정의를 거쳐, 조악하게만 느껴져 내팽개쳤던 정의 또한 거쳐, 오늘의 목적과 이야기로 가득한 정의에 당도하였다. 아직 한 계단 더 남았다. 내 생각과 말에 현혹되어 써 내려간 정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안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기에 여기에 하나의 무게를 더 얹어야만 한다. 타인에게로 시선을 돌려 나의 연대가 나아가고 있는 길을 살피고 그들 안에서 난 누구와 어떤 속도로 발맞춰 나가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살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도 나의 정의 안에 녹여내야만 한다. 그래야, 그렇게 해야만, 나만을 위한 정의에서 적게나마 타인을 위한 정의로도 나아갈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정의다워지는 정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써나가는 정의론은 시작도, 그 끝도 온통 정확함에 맞닿아있다. 그리고 이 정확함을 원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내가 나로서 바로 서길 바라고,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길 바라고, 많은 것을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추억 속 조악한 정의론에 매몰돼 있던 나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난 나에게서 출발하여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온전히 나를 위한 정의론을 만드는 중인 것이다. 이 도돌이표 같은 행동이 지난 과오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건 아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서부터는 '나선형'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단어가 지금의 내 정의론에도 쓰일 수 있겠다. 지금의 정의론은 전과 같은 위치로 되돌아온 듯하지만 미묘하게 한 단계는 올라서 있다. 과거보다 조금 더 넓어졌고, 조금 더 열려있는, 조금 더 고민하기도 하는 그런 확장판 정의론이며 완성형이 아닌 계속해서 성장 중인 정의론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가장 나다우면서도 견고하기도, 유연하기도 한 정의론이기에 전보단 더 나아지지 않았나, 전보다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