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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09. 2024

자고로 만장일치는 어려워야만 한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어긋나 버린 합의


때는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고 12명의 사람은 폐쇄된 공간에 갇히게 된다. 단 하나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이들은 당장이라도 이 덥고 갑갑한 공기 속에서 탈출할 수 있다. 답은 어느 정도 정해진 듯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혐의로 잡혀 온 어린 소년은 평소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려 왔다.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소년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 그가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라는 사실. 이 모든 정보가 12명의 배심원에게 똑같이 주어진다.


이제 배심원들의 마음을 알아보자. 당신은 이 빈민가 소년을 처벌하는 게, 소년이 죗값을 그의 죽음으로써 치르게 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이 소년은 정말로 죄가 있다고 보는가? 유죄, 유죄, 또 유죄.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까. 목격자도 있고 또래의 다른 소년과는 달리 이 빈민가 소년은 자신의 아버지를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것만 같은데도? 그렇게 또 유죄에 유죄가 이어진다.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들은 잠재적 사회악이라는 편견 때문에, 아이가 정말로 유죄라서가 아니라 유죄라고 믿기 때문에, 옆사람이 유죄라고 하니까, 날도 덥고 곧 있을 야구 경기에 늦으면 안 되니까. 이러한 이유로 소년은 11명의 사람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11명은 모두 그가 유죄라 결론을 지었고 결정된 사건으로부터 마음을 비웠다. 유죄라는 관성은 이미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 이런 묵직한 합일 속에서 다른 방향의 숨을 불어넣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퇴근 직전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빠르게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나설 준비를 한다. 시간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 이 갑갑한 공기 속에서 탈출하려는 그 마지막 순간 다시 발목이 붙잡힌다면 우린 엄청난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의 분노는 내 발목을 붙잡은 이 파렴치한 일을 온전히, 유심히 뜯어보지 못하게 한다. 최대한 빠르게 대충 해치우고 사라지고자 하는 열망이 내 안의 세심한 주의력을 솎아내고 이성을 지배한다. 11인의 배심원은 유죄라는 합의로 퇴근을 향해 발 빠르게 본 사건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이제 퇴근만 남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소년을 향해 무죄를 선언한다. 사회에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본 이들은 다들 공감할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결정 난 일, 심지어 이 합의가 곧 임박한 퇴근의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이들 다수의 결정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치껏 동의하고야 마는 현실을. 그럼에도 한 남자는 꿋꿋이 자신의 의심을 11인에게 표한다. 그로 인해 이들의 속전속결의 합의는 깨졌다. 11인은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일에 반대표를 던진 이 한 사람이 이해되지 않고 못마땅하고, 야속하다. 11명은 이 모난 한 명을 잘 구슬려서 일찍 퇴근해 내보이고 말겠단 일념 하나로 그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그를 몰아붙인다.



집요하게 집중하다 정확한 지점을 향해 쏘아라


11인은 유죄라는 만장일치에 대한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단 한 명의 배심원이 던진 의문에 한 명이, 또 한 명이, 두 명이, 그렇게 조금씩 소년이 무죄라는 만장일치를 향해 최초의 유죄 판결을 뒤엎기 시작한다. 서로 영향력이 비슷하다면 다수의 결정에 하나의 의심이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그 의심의 파동이 서서히 커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이의 의견을 다수가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방향이 아닌 그에게 동화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나. 이 신기한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초에 소년이 정말로 유죄라 믿는 이는 소수였다. 검사가 그렇다니까, 변호사도 딱히 나서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년이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내가 무엇을 의심해야겠단 의지도 들지 않는, 그런 수동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 사람이 쏘아 올린 정확한 논리와 정확한 의심 앞에 이들이 빠르게 전복되었다. 그렇게 다수가 무죄로 넘어간다. 무죄 여론이 형성되니 강경하게 유죄를 주장하던 이들이 주눅들기 시작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수의 힘이 사라지고 나니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소년이 유죄라고 강하게 힘주어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근거 없이 한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려 했는지를, 얼마나 자신의 주장에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는지를. 그들은 부족한 근거를 메우기 위해 목소리에 더욱 힘을 준다. 그러나 이들이 목에 더욱 힘을 줄수록, 더욱 분노할수록 이들은 더없이 초라해지고 구차해진다. 잔뜩 성난 목소리로 이미 무력해진 증거를 다시 되풀이해 보지만 빈약한 근거로는 그들의 커다란 구멍을 채울 수 없었다.


최초의 무죄 주창자는 이들과 다르다. 다수의 결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소년이 정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유죄라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 무죄라 주장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덥고 갑갑한 환경과 다수의 비난과 분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과 이 사건에 집중했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를 명확히 하려 노력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 대해 망설였는지를, 무엇이 의심스러웠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는 그 의심의 지점에 정확한 퍼즐을 끼워 맞추고 나서야,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한다. 이 끈기와, 용기와, 집중력은 가히 본받을 만하다. 편견의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선 이런 집요함과 강인함이 필요함을 그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의심스러운 지점을 끈질기고 용감하게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이 의심스러운 지점의 정확한 명치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이 지점을 탁! 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힘으로도 다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



만장일치는 어려워야 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만 하더라도 만장일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그림부터 떠올라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만장일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감에 있어 걸림돌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한 명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평소 당연하다 여겨 온 것들에 대해 그 옳음을 증명하는 일이 수반될 수도 있다. 이런 당연한 것에 대한 증명이 불필요하다 느껴질 수도, 시간 낭비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난 영화 속 최초의 무죄 선언자로부터 어렵게 이뤄낸(물론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된) 만장일치가 개개인의 미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만장일치를 향한 노력은 나를 비롯한 이 과정의 참여자 모두를 탄탄하고 더욱 건강하게 한다.


나와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나의 주장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로 포장하고, 그가 이해하기 쉽게, 받아들이기 쉽게 설명해 내야 한다. 그래야 내 말에 진정한 설득력이 생긴다. 타당한 근거를 추진력 삼아 나간다면 말에 힘이 생긴다. 단,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를 설득하지 못하여 약이 오르는 순간에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면 나 그리고 모두가 이 싸움에서 지고 만다. 감정이 끓어오르는 순간 이성이 감정에 잠식되면서 이후로는 정확한 정보 전달, 상호 간의 완만한 소통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빠른 속도로 주변을 동일한 감정으로 물들인다. 따라서 감정 조절은 필수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공들여대화하고 나면  우린 이전과는 달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방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꼬이는 부분을 발견한다면, 말문이 막히는 부분이 나온다면 이를 통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 가져다 썼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막강해 보이던 나의 주장이 쉽고 빠르게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에 불과했단 사실을, 허상에 불과했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부족함의 깨달음은 채움을 향한 갈망을 낳는다. 채우고자 하는 갈망은 새로운 이해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한다.


만장일치는 어렵다. 모두가 같은 결론을 맺기는 어렵다. 그러하기에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 과정이 더욱 뜻깊어진다. 당연하던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만든다. 누군가와의 정확한 대화, 정확한 맞물림이 어렵다는 쓰디쓴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과정이 세상을 더욱 겸손한 자세로 바라보게 만든다. 단 하나의 결론에 닿기 위해 깨부수고 다시 조합하는 일을 반복해 나갈 때마다 우린 점차 깊이를 갖추게 된다. 그냥저냥 넘겼더라면 이 사건의 이런 면과 저런 면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아야만, 이 하나의 사건에서부터 뻗어나간 다양한 갈래의 길을, 그 가능성을 알아야만 우린 깊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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