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온 Mar 24. 2024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

2024년 3월, 모나코 공국에서

우리에겐 평소와는 다른 선택, 의도치 않았던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결같은 선택으로 키워낸 나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힘이 부족하다. 잘 안다고 생각해 오던 영역에 대해서도 앎의 깊이 부족, 세심함의 결여로 인해 인지하지 못하거나 평소 보던 방향이 아닌 다른 측면에 놓여 있어서 인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나답지 않은 일을 벌여야 한다. 그러하기에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평소 나 같지 않은 길에 발 들이고 그 길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맛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전혀 갈 마음이 없었던 여행길에 억지로 꾸역꾸역 오른다거나 계획했던 곳을 지나쳐 버리는 바람에 실수로 다른 길에 접어들게 된다거나. 의도적으로 튼 방향을 향해 억지로 나를 밀어 넣거나 실수로 빚어진 우연이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지난번엔 억지로 미끄러져 들어온 프랑스 니스와의 첫 대면에 관해 이야기했으니, 이번엔 실수로 만나게 된 모나코 공국을 얘기해 보려 한다.



내가 원래 의도한 목적지는 Chemin de Nietzsche, 니체의 길이었다. 이 길을 걷고 난 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 굉장히 멋진 경험이 될 것 같았기에 무조건 이곳은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바로 다음 날은 아침부터 안시로 이동해야 했기에 이날이 니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절대로 실패는 없다는 마음으로 전날도, 혹시 몰라서 당일에도 가는 길을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였건만 무심한 구글맵이 내게 잘못된 정거장 정보를 알려준 덕에 하마터면 버스를 타지도 못하고 돌아설 뻔했다. 다행히도 한 가닥 남은 이성의 끈으로 간신히 눈치껏 진짜 정거장을 찾았다. 덕분에 오르는 건 성공했다! 비록 내리는 건 실패했지만. 새벽 업무의 여파로 인한 피로와,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해 급히 글을 써 올리느라 남아있던 집중력을 탈탈 털어 써버린 탓과,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한 파워워킹으로 고갈돼 버린 내 체력과, 버스를 간신히 타게 된 데에서 몰려온 안도감,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게 된 새로운 광경, 그 너무나 아름답던 풍경을 향해 몽땅 흘러 나가버린 혼 탓이다. 결국 난 내릴 곳을 정확히 하기 위해 구글맵을 보며 추적해 오던 내 위치에서 시선을 오랜 시간 떼버렸고 그렇게 제 곳에서 내리지 못하였다.



정거장은 이미 지나쳤고 지금 내려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등산에 소요되는 시간, 그리고 일몰 시각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니체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평소의 나였다면 꼭 하고 싶었던 일, 했어야만 했던 일을 못 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나를 실패하게 만든 모든 원인 하나하나를 곱씹어가며 차근차근 화를 냈어야만 한다.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때는 당황은 했을지언정 화에 휩싸이진 않았다. 후회와 분노보다 빠른 대책을 찾고 있는, 이것은 마치 업무를 하는 기분. 일과 관련된 무언가를 할 때가 아니고서야, 특히나 일상에서는 이랬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평소답지 않게 화가 나지 않는다. 실패로 인해 내면에선 은근한 긴장감이 도는데 이게 오히려 묘하게 들뜨게 만든다. 화에 맞닿은 들뜸이 아닌 즐거운 들뜸. 그런 살짝 흥분된 상태에서 차선책으로 모나코를 택했다. 니체 길을 찾을 때 버스 노선표를 보며 일반버스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넘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신기함과 호기심이 잠깐 일기는 했으나 진짜로 갈 마음은 없었는데 결국 내 발길은 모나코, 이곳에서 멈추는구나. 이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려나.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모나코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건 해야만 할 일인 여행길에 오르는 일에 이미 착수하여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인 것 같다. 평소 일상에서는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계획만 해놓은 상황이었기에 계획이 어그러지자마자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던 것이고. 아마 니체의 길로 이미 가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화를 삭이는 데 열중한 나머지 모나코라는 대안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길을 나섰고 피로로 혼미해진 정신이지만 어떻게든 갈 길은 가야만 한다는 마음으로 긁어모은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집중력이 모나코라는 긍정적인 우연의 산물을 내게 선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모나코에 도착했다. 어딜 둘러볼까 하다가 정거장에서 바로 보이는 성벽으로 난 오르막길로 발길을 옮겼다. 니체 등산길을 놓쳤으니, 이곳의 오르막길이라도 올라야겠다 싶어 냅다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꽤 높다. 밑을 보니 모나코가 한눈에 보일 만큼 높다. 성벽은 두껍고 튼튼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세계만큼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단단함으로 무장된 안전한 곳이다. 안전한 만큼, 그러면서도 시야는 가리지 않을 만큼의 딱 적당한 높이로 성벽이 둘러져 있다. 이 요새에서 발아래 모나코를 내려다본다. 계획의 실패로 남아있던 약간의 불안마저 소멸한다.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해진다.



본디 높은 곳은 떨어짐에 대한 불안을 조성하기 마련이다. 나를 지지해 줄 그 어떤 장치도 없는 높은 곳은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당도한 이 새로운 장소가 어떤 숲인지, 어떤 형태의 건물이 주로 있고 길은 어떻게 나 있는지, 무엇이 어디에 모여 있는지와 같은 전반적인 정보를 주기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기에 불안을 덜어주기도 한다. 추락하려야 추락할 수 없는 탄탄한 구조물과 든든한 난간이 지지해 주는 곳이라면 추락이라는 새로운 불안이 싹 틔우긴커녕 있던 불안마저 덜어준다. 그래서 튼튼하고 안전한 높은 곳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을 좋아한다. 니체의 길도 그래서 오르고 싶었고. 눈앞에 닥친 현실을 그때그때 온몸으로 부딪혀 가며 인지하는 과정은 새로운 앎을 얻어가는 점에서, 그렇게 차곡차곡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서 완성해 나가는 점에서 분명 매력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적게나마 불안을 겪는다. 내가 그려낸 지도가 맞는 건가, 이다음엔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이 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어디에서 끝이 나는 걸까. 이럴 때 우연히 만나게 된 모나코의 Place du palais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불안은 사라지고 평온함과 여유가 생기는 곳, 낯설기만 했던 공간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만드는 곳.








이전 05화 오늘 난 다른 공간에서 다시 태어난 날 생각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