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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 Mar 02. 2024

치우치지 않을 결심, 공정해질 결심

제시카 노델의 편향의 종말


안락하지만 답답했던 좁은 공간에게 안녕을 고하다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적은 양의 지식만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반면에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사람, 이 세상을 다채롭게 인지하고 경험하길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아는 게 협소하면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그 대상의 복잡성을 내 협소한 지식수준에 맞춰 단순화하게 된다. 단순화는 빠른 사고,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주요 능력 중 하나일 테지만 내가 부족하여 단순한 세계에 만족하고 그 안에 눌러앉는다면... 나에게 주어진 그 이상의 영역을 맛볼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이 좁디좁은 나만의 성역 속 안락함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살면서 가장 많은 제약을 거는 것은 우리의 편향된 사고일 것이다. 한 번 각인된 인식을 기반으로 넘을 수 없는 한계선이 형성된다. 이 한계선은 분명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한계가 가짜임을 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은 이를 실재하게 만드는 데 있어 충분한 힘을 발휘하기에 한번 결정된 경계는 쉽게 무너지지도, 넘어서기도 어렵다.


다행히도 나의 내면엔 엘리베이터에 대한 은근한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회색 철판으로 둘러싸인, 가봤자 위 또는 아래인, 상당히 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단적인 공간. 단조롭고 예상가능하기에 안락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가끔은 홀로 이 공간에 들어설 때 난 께름칙함을 느낀다.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이 단순한 구조물에 갇혀 무엇을 얼마나 더 해볼 수 있을까. 공간이 점점 옥죄어 오는 듯하다. 이곳에서 난 완전한 고립감을 얻는다. 이대로 추락해도 나의 이 추락을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것이며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내가 나만의 사고 한계에 갇혀 버린 것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깥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쉰다. 그런 기분이다. 내가 여태 살아오며 막연하게 당연시해 오던 것들, 더 이상 고민해 보기 귀찮아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 심지어 이에 위배된 인간을 향해 비난의 소리까지 높였던 그것들, 엘리베이터 안과 같은 이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제대로 숨 쉬어보기 위해 난 그들에게 안녕을 고한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귀찮음을 이겨내고 의심해 보면서 그들을 뒤로한다.



평온함이 필요한 이유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세상을 자꾸만 협소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습관을 멈추고자 편향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편향은 나의 인지 한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이다. 한계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건이 편향이니까.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편향이 발생한 순간을 찾아보면 감정적으로 격해진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즐거움으로 격해진 상태면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대상에게서 긍정적인 측면만 발견하게 되고, 우울하거나 분노로 격해진 순간에는 긍정적으로 보던 대상에게서마저도 숨겨져 있던 부정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극단적인 심리 상태에선 그 대상이 얼마나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는지 여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그 순간의 감정에 가장 어울리는 특징 하나, 딱 그것 하나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정확함을 상황에 따른 사고 변화가 가능한 상태, 어디로든 튀어 나갈 수 있는 유연한 상태, 가장 그럴듯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맞춰 가장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내가 그나마 정확할 수 있는 순간은 평온함을 얻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이 한층 누그러지면 그제야 단편적으로 생각 몰이를 했던 직전의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부족한 나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은 나의 인간성을 훼손한다. 난 뒤 늦게나마 상처 입은 나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몰이에 희생당했던 대상을 다시 생각한다. 잔잔해진 감정은 사람을 유연하게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는데 평화를 되찾고 나니 내가 아닌 그 사람이 보이고 들린다. 그렇게 그가 지닌 모든 특징을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나열해 본다. 누가 맞고 틀리고를 가려내는 게임에서 벗어난다. 각자 드러낸 자신만의 맞음이 어디서 출발해서 조금 전 나에게 도달했는지에 집중한다. 승리의 기쁨 또는 패배의 쓰라림을 넘어선 확장의 찬란함에 고무된다.



결국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밖에 없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수치의 현장을 겪어왔지만, 이 중 가장 으뜸인 것, 오늘날의 나를 가장 강력히 지배하고 있는 흑역사는 부족한 지식으로 내린 지극히 단적인 나의 판단을, 누군가를 향해 맞다고 바락바락 우겨댔던 순간이다. 내가 부족했음을, 고려해야 했으나 당시엔 알지 못하여 차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알아채게 된 날 나의 온 과거가 나로부터 부정당한다. 그 친구의 말이 맞았고 내가 틀렸다. 너무나 부끄럽고 후회가 되지만 되돌릴 순 없다. 지금의 이 수치를 극복할 수 있는 그나마 실현 가능한 일은 다음엔 이런 일이 없도록 미리 대비하는 것, 그것뿐이다.


훗날의 수치 한 점 없는 나를 위해 열심히 자료를 수집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다양한 관점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를 보고, 저마다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것을 기반으로 나를 이루고 있던 축 하나하나를 의심하고 뒤집고 재배치한다. 나 혼자서 나의 세계를 넓히기는 어렵다. 아는 세계가 달랑 나 하나인데, 내가 아는 게 고작 나의 그릇에 담겨있는 이것들이 전부인데, 이걸 가지고 다른 것을 상상해 내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그래서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세계를 담아낸 작품은 나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게 하고 그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나와는 다른 과거로부터 빚어진 사람과의 대화는 이들의 생애가 공백이 아닌 무언가로 가득한, 그런 충만한 삶을 살아온 이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타인을 향한, 외부 세계를 향한 여백이 채워질수록 이들 존재의 무게는 커진다. 이들의 무게가 나의 무게, 내 가치의 무게에 가까워질 때쯤 이들은 나와 대등한 관계가 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존중받게 된다.


외부의 존재로부터 얻은 지식은 내가 믿어온 것들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사는 데 치명적인 영향을 주진 않지만 매우 거슬린다. 그래서 계속 오다가다 들여다보게 된다. 신경 쓰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생각 또한 거듭된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익숙하던 것이 반기를 든다. 이렇게 하나의 단일한 사고에 점차 의심의 살이 붙는다. 이렇게 단순한 사고 하나에 깊이가 생기고 어떤 때는 아예 다른 새로운 관념이 이전의 관념을 갈아치우기도 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편향성은 조금씩이나마 축소되고 그만큼 나의 사고 공간은 확장되며, 나의 과거 수치의 현장이 재현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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