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가장 밝게 빛나는
인물이 상당히 눈에 띈다. 찬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찬실의 주변인물도 모두 눈이 간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은 듯해서 그러했고,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을 수 있는 것 중에서도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날 법한 것만 담아내서 그러했다.
영화는 힘들고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찬실을 따라간다. 그런 힘든 상황임에도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삶의 동력을 찾아낸 찬실, 그리고 그런 찬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주었던 모든 이들이 소박하고 담백하며 지나치지 않게 담겨있다. 그래서 진실로 따듯했다.
드러나는 인물의 성격, 대사 그리고 찬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마저 자연스럽다. 인간극장 같은 현실감이 있다. 그러나 가끔 부자연스러움이 보인다. 귀신이라든가, 다큐멘터리로 보기엔 다소 영화적인 부분이 앞선 자연스러움, 현실감과 대비를 이룬다. 이 부자연스러움은 찬실이라는 현실적이고 흔할 수 있는 인물을 주연으로 내세우기도 하고, 찬실의 상황을 가볍게 그리고 우습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연출이 내겐 부담 없이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게 해주었으며 그녀를 주목하게 했다.
찬실의 시작-중간-끝
여태 찬실, 그녀 인생의 주인공은 지 감독 그리고 영화였다. PD(program director)인 찬실은 그저 조력자에 불과했다. 주연이 더 잘날 수 있게 하는 조연이었다. 이제 삶의 의미와 같던 주연이 죽고 찬실만 남았다. 바쁘던 일상이 사라졌고 자신의 가치마저 사라졌다.
찬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고민한다. 사랑? 그동안 일로 채워진 삶을 살던 그녀 앞에 김영이 등장한다.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지는 것 같다. 그렇다. 사랑, 이 외로움을 달랠 줄 남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찬실이 쏘아 올린 사랑은 상처만 남긴다. 왜 그녀는 실패만 거듭하는가. 영화도, 사랑도 그녀의 손에 잡혀주질 않는다. 그런데 재밌게도 영화는 이런 결론을 맺는다. 찬실은 다시 영화를, 다시 김영을 마주한다. 찬실은 과거에도 지금도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젠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좋아하려 한다. 그녀는 이제 조금 더 주체적으로 영화에 개입하려 한다. 찬실은 이전에도 지금도 사람을 만난다. 외로움을 달랠 줄, 힘든 마음을 위로해줄 남자가 아닌 좋은 친구를 만난다.
영화는 찬실의 시작과 중간, 끝을 통해 이런 말을 건네는 듯하다. ‘네가 너무나 좋아하던 것이 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그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좋아하는 목적, 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그 대상도,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한 채 좋아한 게 문제 아닐까?’
혼자가 아니다
찬실에게 필요한 것, 찬실이 원하는 것 그 대부분을 인물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주인집 할머니는 그날그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대신 애써서 한다. 장국영은 찬실의 속마음을 들어준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힘으로, 직접 부딪혀가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낼 수 있게 최소한만 돕는다. 소피는 근심걱정이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매일을 알차게, 즐겁게 보낸다. 김영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를 향한 애착의 고리는 느슨하다. 그래서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에 찬실만 남았더라면, 외로운 그녀만 덩그러니 남겨졌더라면 그녀는 진짜 답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로했을 수도 있다. 혼자만의 생각은 착각의 공허한 메아리를 걸러내기 힘들다. 상처받은 이들은 진짜 문제를 직시할 힘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 곁엔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어 줄, 찬실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일으키는 바람으로 찬실은 다시금 일어나 이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좋아해 왔던 것을 또다시 마주한다. 문제를 직시하고 진짜 답을 찾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