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웨이킹 라이프(2000)
꿈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꿈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바라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말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너무나 다양한 관점에서 말한다. 주인공은 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입을 빌려 그 많은 이야길 들어야만 했을까. 왜 현실이 아닌 꿈에서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일까.
꿈속은 자유롭다. 꿈은 현실에서 가해졌던 수많은 제재가 느슨해지고 근원적인 내가 깨어나는 공간이다. 그 어떠한 생각도, 행위도 허용된다. 현실이었음 나를 중심으로 철저한 통제 아래 이루어졌을 생각들이 꿈속에선 나 아닌 또 다른 나에 의해 이루어진다. 분명 그 또한 나이지만 현실에서 정의된 나와는 다르다. 그곳은 평소 알고 있던 나와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하기에. 그곳에선 현실에서의 나를 버리고 자유롭고 무분별한 또 다른 내가 각기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자유로운 사고를 꿈꿀 수 있다. 이것이 영화가 꿈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도 우린 결국 바다를 향해 간다
어떤 색의 크레용으로,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도 우리는 바다를 향해 간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성취하려는 방법과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목표인 바다로 향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과정도 중요하다. 목표를 향하는 과정을 꼼꼼히 계획하고 진행하며 이후 결과를 놓고 그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나가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결과보다 더 큰 의미를 얻을 수도 있다. 다만 목표가 바람직하다는 가정하에 이를 수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선택하는 것 또한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영화야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 생각한다.
순간에 대한 관찰이 특별함을 만든다
내겐 만두를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 오늘 그 친구와 만두를 먹게 되었는데 만두를 향한 그 아이의 거부감이 노골적이라 그 이유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만두가 터지는 게 싫단다. 터짐으로써 지저분해지는 만두. 그게 싫어서 만둣국을 먹을 땐 입안이 데일 것을 알면서도 한입에 넣어버리곤 한단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그 만두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웃기고 신선하다. 맛이 없어서도, 만두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도 아닌 만두의 터짐 때문이라니!
영화를 보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 아이의 만두 이야길 듣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만두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 아이의 독특함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만두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만두와 터짐과 지저분함을 연결 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군가와의 차이는 '눈에 띄는 행위'로부터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그 행위에 도달하게 된 이유'로부터 남들과의 차별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행위가 노출된, 생각이 만들어진 순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고찰로부터 유추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대단한 이유가 아닐지라도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말의 자유성
인물들의 물 흐르듯 자유롭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돋보인다. 자유로움 그리고 대화를 향한 갈망.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고 나면 매번 느끼던 것이 이 영화에서도 느껴졌다.
사람이 자유를 느끼는 방법에는 탁 트인 공간에 자신을 두는 방법도 있고, 기존의 틀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겠지만 내게 유난히 끌리는 방법은 '말'이다. 그 어떤 장벽 없이, 개연성 따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른 누군가와의 대화는 더 즐겁다. 나에게 갇혀 지내던 생각들이 그 사람을 통해 밖으로 뻗어 나갈 수 있으니까. 이처럼 말이란 안과 밖으로 자유를 불어넣는다. 말은 한계를 뛰어넘고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