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잠비 Sep 22. 2022

[짧은 소설] 이별 사유

돌이켜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멀어진 관계가 여럿 있다. 왜,라는 걸 생각해봤자 그건 사실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일이어서, 어떤 일은 그러니까 이유가 없는 게 이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고는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과 생의 덧없음, 뭐 이런 걸 떠올리고 마는 그런 일들.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지만 틈은 서서히, 하지만 분명하게 벌어지고 인연의 끈이란 그렇게 가느다랗게 늘어지다 한순간 툭, 끊어져버리는, 연약한.


 어느 날 문득 멀어진 그가 떠오르고, 다시금 관계의 회복을 꾀한다 한들 멀어진 이유를 알 수 없다면 딱히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마련이다.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려면 그 어긋남을 만든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게 순서인데 그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도대체 우리가 왜 헤어졌지?”     


 육 년만이었다. Y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J는 휴대전화 액정에 뜬 번호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보험회사나 대출업체에서 걸려온 광고 전화일거라 생각하고 무시했지만 네 번째 진동이 울리자 그건 아닌가보다, 생각했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야했다. Y의 질문에 J는 문득 육 년 전을 떠올려야했고, 그 역시 명쾌한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 탓은 아니었다는, 그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육 년이면 기억나는 게 있더라도 그게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 정확한 기억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기억은 아련하고 J가 생각하는 스스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관계를 흐지부지 끝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사람이지.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어차피 Y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까.     

 

 “너 때문 아니었어?”        


 탑골공원 맞은편 관철동 골목길 스타벅스는 예전 그대로였다. 이층 창가 자리에 앉으면 보이던, 색색 알전구로 장식한 촌스러운 모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세 시간 방을 빌리는데 이만 원 받던 낡은 모텔 대신 높다란 비즈니스호텔이 들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드나들던 골목길이 J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먼저 도착한 Y는 북적이는 커피숍에서 용케도 오래전 즐겨 앉던 구석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얼음물 한잔을 떠놓고 번갈아 마시는 버릇은 여전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일순간 J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함께 쏘다니던 길거리며 단골 술집들, 살을 맞댔던 수많은 낮과 밤, Y가 즐겨 쓰던 향수의 은은한 향까지 봇물 터지듯 떠올랐다. 그래도 Y와 헤어진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J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할 때 찡그리는 버릇은 여전하네.”

 “왜 만나자고 했어?”

 “궁금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거든. 너랑 왜 헤어졌는지.”

 “말했잖아. 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J를 떠올린 Y는 전에 없던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마치, 다락방 구석 더께 쌓인 상자 안에서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곰 인형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련하고, 그립고, 애잔한. 돌이켜보니 좋은 기억만 떠올랐다. 둘은 서로 사랑했고, 불확실한 미래였지만 끝내 함께 할 거란 암묵적 신뢰가 있었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종종 사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어느 것도 관계를 끝장낼 만 한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을 계기로 멀어지기 시작했는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사정은 J 또한 마찬가지였다.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지만 육 년 만에 마주한 Y는 여전히 J의 이상형, 그대로였고 헤어졌다는 것만 기억날 뿐 사실 나쁜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아니 애당초 그런 게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우린 헤어졌어.”

 “왜 그런 건지 궁금하지 않아?” 

 “이제 와서 그걸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데?” 

 “이제 그만 헤어지자, 그런 적도 없고 크게 싸운 기억도 없어.”

 “자연스럽게 멀어졌겠지. 바빴잖아. 먹고 사느라.”


 마음 깊은 곳에서 이는 감정과 달리 J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에는 하나같이 날이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Y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오래전처럼 손을 맞잡고 볼을 맞대고 기분 좋은 살 냄새를 맡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헤어진 건 헤어진 거니까. 그럼 그냥 다시 사귈래, 할 수는 없으니까. 육 년은 긴 시간이니까.      


 “그걸로 괜찮아? 그랬겠지 하는 걸로?”

 “그럼 어쩌라고. 이제 와서.”

 “지금 짜증내는 거야?”

 “네가 짜증나게 하잖아. 이게 뭐야. 불쑥 연락해갖고선.”

 “너도 궁금해서 나온 거잖아.”

 “안 궁금해.”

 “근데 왜 나왔어?”

 “아, 씨…… 몰라 나도.”     


 침묵이 이어졌다. 고작 몇 초였겠지만 J에겐 영겁처럼 느껴졌다.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헤어진 이유를 알 수 없어 화가 나는 건지, 다시 Y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에 짜증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그런 J를 말없이 쳐다보던 Y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J는 무표정한 Y의 얼굴을 마주봤다.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일말의 기대 끝에 그러면 그렇지,하고 실망하면 인간은 저런 표정을 짓기 마련이다. 뜨거운 커피는 채 식지 않았고 물 컵의 얼음도 그대로였다. 어쩌면 쉬이 변하는 건 사람 뿐일지도 모른다고 J는 생각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네. 어쩌면 이래서 헤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

 “잘 살아.”     


 Y가 떠난 뒤, J는 Y의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쳐다보고 있었다. 점점 옅어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즈음 컵을 들어 입가에 가져왔고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는 아직 따뜻했다. 한여름에 무슨 뜨거운 커피야……… 그 때였다. 조금 전까지 Y가 앉았던 자리에 정장 차림의 사내가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흠칫 놀란 J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시죠?”

 “여자 친구 분이랑 다투셨나 봐요?”

 “그게 무슨…….”     


 그 순간 J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J는 어딘가 묘하게 이국적인 인상을 풍기는, 좀처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낯선 사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뭉그러진 기억이 점차 모양새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신을 본적이 있어.”     


 이번에 흠칫 놀란 건 상대방 쪽이었다. 정장 사내의 두 눈이 조금 전 J처럼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사내는 평점심을 찾은 것 같았다.      


 “이런, 원래는 저를 본적이 있으면 안 되는 건데요.” 


 육 년 전이었다. J와 Y는 여느 때처럼 관철동 어학원 앞에서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는 모텔에 들어가 섹스를 했다. 모텔에서 나와선 여느 때처럼 포장마차 거리를 찾았고 늘 가던 익산집에서 잔치국수와 꼼장어를 주문해 소주를 마셨다. 적당히 취했고, 종종 그랬듯 사소한 다툼이 있었으며, 술을 더 마시겠다고 고집부리는 J를 남겨둔 채 Y 혼자 일어나 택시를 잡아탄 밤이었다. 그날 밤에도 사내는 홀연 나타나 Y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이며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밤인데도 넥타이까지 맨 검은색 정장 차림이 또렷이 기억났다.       


 “당신이 약을 줬어.”

 “약을 다 마시지 않았군요?”

 “무슨 짓을 한 거야?”

 “전 도와드린 겁니다. 상처 없이,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아니, 그건 불가능에 가깝죠.”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J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Y에게도 약을 줬어?”

 “그건 아닙니다만, 이 일을 하는 게 저 뿐인 건 아니거든요.”     


 사내가 서류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녹색 액체가 담긴 투명한 작은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 와중에도 J는 육년 전 그날 밤 기억의 조각을 짜 맞추느라 애쓰고 있었다.  

    

 “드물지만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요. 제 책임은 아니지만 뭐, 에이에스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빙긋 미소를 띤 채 바라보는 사내를 뒤로하고 J는 뛰다시피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Y는 아직 그리 멀리 가지 않았을 터다.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때 J의 눈에 그들이 보였다. 거리를 메운 인파 중 절반가량은 분명 그들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과 검은 정장, 갈색 서류가방을 든 비슷비슷한 얼굴들. 저 많은 그들이 지금껏 왜 눈에 띄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J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뭐야. 왜 말을 안 해? 여보세요?”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