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 쉽게 잊히는 것들 때문에 아쉽긴 하지만 당분간은 그 기록이 마음에 남아 있으니 만족한다. 이번 여행으로 기억이 리셋된 느낌이다. 어둡고 축축한 과거의 기억을 일주일간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광이 모두 덮어버린 듯하다. 꿈이 기억의 산물인양 밤마다 꿈을 꾸면 좋은 꿈보다는 어떤 어두운 장소 결코 유쾌한 내용만이 아니었지만 스위스 여행을 다녀온 후부터 꾸는 꿈은 광활한 지역이 나온다.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직도 피곤과 쉽게 잠들지 못하는 시차적응으로 인함인지 짧은 시간 깊게 떨어지고 말지만 꿈을 꾼다고 하면 기억도 못할뿐더러 어떤 광활한 지역이 나오는 것 같다. 멘리헨에서 클라이넥 샤이덱까지 한 시간 이상 주변의 융프라우 지역의 거대한 설산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느낌은 정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 트래킹이었다. 내가 밤마다 꿈을 꾼다면 그 스위스 지역이 나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꿈은 최근 2주 전의 일이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아직 2주가 지나지 않아서 선명하지 않은 것일까 생각했다.
생애처음으로 50대에 혼자 스위스 자유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이 아직도 꿈만 같다. 1년 전에 예약을 하고 가기 전 얼마나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저녁이 되면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공포감, 낯선 타국에서 이런 공포를 혼자 느껴야 하다니, 아니 차라리 그냥 편하게 여행이고 뭐고 패키지나 가고 그냥 여행 갈 돈으로 필요한 거 사고 먹고 그냥 그렇게 보내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하며 별의별 생각을 하며 시간이 지나갔고 슬슬 여행이 몇 달 앞으로 가까워지고 말았다. 이젠 취소하기도 어려우니 그냥 모르겠다 닥치는 대로 해보자 했다. 몰아쳐서 준비한답시고 한 일주일 동안 정리하고 노트에 적고 한 일주일을 그러다 말았었다. 보조자료는 무지 많이 가지고 갔지만 실제로 크게 활용한 기억은 없다. 현장에서 중요한 건 구글지도를 잘 볼 수 있는 지리감각과, 스위스 열차표를 보고 시간 파악 잘하고 플랫폼 잘 찾고 주어진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융패스를 잘 활용하는 스킬등이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정말 혼자라도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루체른 항구에서 현지인처럼 또는 관광객처럼 이리저리 배회하며 라트하우스 양조장 맥주를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다니며 마시면서 골목 곳곳을 방황하며 무제크 성벽까지 가서 그 꼭대기까지 힘들게 올라갔던 기억들, 아니 무제크는 괜히 갔다. 그 시간에 역사박물관을 가볼걸, 초콜릿 어드벤처를 찾긴 찾았지만 즐기지 못하고 바로 버스를 반대로 타고 가서 내리고 다시 돌아온 기억들, 루체른 역 앞에서 버스 정류장이 그렇게 뒤섞여 있는 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 유람선도 타고 루체른 곳곳으로 가는 모든 교통이 그곳에서 연결되고 있었다. 엥겔베르그행 첫차를 타고 티틀리스도 가고 오후엔 혼자서 필라투스를 가서 높이의 산들을 산악기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든 느낌은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성한 느낌이었다. 여행 떠나기 전 내가 꿈꾸고 상상했던 어떤 모습과 조금씩 일체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이번 여행은 이제 어쩌면 혼자 세계여행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퇴직 전에 가보고 싶은 나라가 많다. 젊은 시절엔 혼자 자유여행 하는 것이 그리 어렵게 보이고 물론 그땐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나름 용기를 얻었다. 나이 드는 것만이 그리 안 좋은 면만이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뻔뻔함 같은 용기가 내 안에서 샘솟는 것 같다. 그리고 또다시 난 나도 모르게 내년 10박의 스위스행 티켓을 끊고 말았다.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도 보고 싶고 , 알래스카도 가고, 포르투갈, 이집트, 그리스 정말 가보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여행을 가는 데는 시간과 돈 외에도 뭔가 가고자 하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 이젠 그 동력을 자가발전을 돌려서라도 만들어야겠다. 항공권이 비싸지 않은 시기를 택하고 호텔이 아닌 유스호스텔을 이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가고 싶은 나라를 못 갈 이유도 없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