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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현 Mar 17. 2020

이사하는 날

"아니, 이런 것도 들고 왔어? 좀 버려, 엄마. 쌓아놔 봐야 결국엔 다 버릴걸 뭐 하러 쟁여놔. 그때그때 버리고 필요하면 또 새것 사서 쓰고, 그게 살림하는 재미지. 그렇다고 그게 억만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고. 아니아니 내 말은 낭비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제 새집에 들어가는데 헌 물건 좀 버리고 살라는 거지. 아이고 나 중학교 때 쓰던 물건들도 여직 있네."

한 번 시작된 나의 잔소리는 이삿짐이 다 풀릴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엄마도 그리 듣기 싫은 눈치는 아니어서 내 잔소리도 끝나지 않는다.


내 기억으론 지금까지 우리 집은 대략 예닐곱 번의 이삿짐을 쌌었다. 부모님의 하루도 쉼 없는 근면성실로 적은 평수에서 좀 더 큰 평수로 적은 금액의 전세에서 좀 더 큰 금액의 전세로 그렇게 근근이 살림을 불려갔지만, 그 중에도 새집은 없었다. 남의 집이어도 새집은 없었고, 내 집이어도 새집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이사는 엄마에게 있어 그간의 이사와는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내 집이면서 새집으로의 이사이기 때문이다. 엄마 나이 육십에 처음 가져 보는 새집. 스물여섯에 아버지에게 시집 와 지금껏 어떻게 내 집이란 것은 겨우 마련해 보았어도 새집 살림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엄마였다. 딸 둘을 시집보내면서 작지만 새 아파트에 신접살림을 내는 걸 보고 연방 좋다고 말할 땐, 그저 밥이나 해 먹으려나 걱정했던 딸들의 깔밋한 살림 솜씨가 기특해서 그리고 그 옛날 당신보다는 시작이 좀 더 수월해 보여 앞날의 고생이 덜할 것이란 안도감에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어디 그것뿐이었을까. 새집 살림을 보며 차마 자식 앞에서 드러내 놓지 못한, 감동도 아니요, 기쁨도 아니요, 그렇다고 부러움은  더더욱 아닌, 그 어떤 음의 사정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자식을 키우고 손바닥 손금 보듯 빤한 남편 월급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며, 살림이라는 걸 살아내는 여자에게 집이란, 그것도 새집이란, 재산 규모의 척도를 넘어 얼마나 큰 인생의 보상이며 또한 선물인가. 어느 여자에게고 새집에 들어가는 날은 새색시 시집가는 날만 같으리라.

육십 평생을 여자가 아닌 아내와 엄마와 며느리의 일만을 여일하게 해 온 엄마. "내 환갑 진갑 다 지나고 느이 엄마 육십에 이제 처음 새집이다. 남자인 나도 좋은데, 느이 엄마는 오죽하겠냐. 내가 말은 안 했어도 느이 엄마한테 미안한 게 많은 사람 아니냐. 이제 마음의 짐을 좀 던 기분이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그간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차마 흘리지 못한 눈물처럼 배어 있었다. 마누라 고생시킨 남편의 애달픈 마음, 새살림 살뜰히 차려놓고 살고 싶었던 여자로서의 엄마의 맺힌 마음이 이번 이사로 조금은 풀어졌을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청소거리 속에서 나의 온갖 타박도 지청구도 다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엄마에게 오늘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이다.



* 십여 년 전, 신문사에 기고하고 원고료로 10,000원 정도를 받았던 글을 여기 다시 기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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