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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Feb 05. 2022

능력자가 의심 받는 이유

유능함은 단순하다. 자신의 본분에 맡겨진 일을 잘 해내는 사람. 그런데 불확실의 시대에서 이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해지지 않게 됐다. 불확실의 시대에선 본분이란 개념조차 모호해지고 있으니까.


지금 시대는 왜 불확실한 것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 전환기에는 언제나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각종 지도자들부터 신, 이성, 돈까지... 모두 직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인물과 개념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은 같다. '신뢰'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한 형태라는 점이다. 인인물은 그렇다 쳐도 신, 이성, 돈 이런 것들이 과연 구체적 형태인가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신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저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의 질문에 답이 되어주는 게 종교였고, 학파였고, 어느나라 국민이냐 였고, 경제력이었다. 이처럼 신뢰를 구체적 형태으로 보이는 것이다.


시대 전환의 승자가 되어준 표상의 근본이 모습만 바꾼 '신뢰'였다면, 현재 우리 시대가 전환기의 길목에 들어선 이유는 기존 신뢰는 효력을 다했고, 우리에겐 새로운 신뢰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도 신을 모시는 교회의 부패가 반복되자 이성의 시대가 떠올랐고, 제국주의의 잔혹함이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는 결과로 귀결되자, 돈이 최고의 신뢰 자본이 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윤리의 기준이자 세계 금융의 허브와도 같았던 미국이 돈을 무한정 찍어내는 양적 완화를 하자 신뢰 자본은 과학기술쪽으로 기울어졌다. 2014년 4차산업혁명 바람은 그래서 분 것일까? 하지만 2020년 4차 산업혁명은 벌어지지 않았고, 대신 벌어진 코로나 팬데믹에서는 의학 기술이 개발한 백신이 100% 바이러스를 막아주지 못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와 기대가 한풀 꺽은 듯 보인다. 이제 우린 무얼 믿고 타인과 협동하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전세계에 리더십이 부재한 것도, 능력주의가 의심 받는 것도 다 이 신뢰 부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지.


새로운 신뢰를 찾아 실현시키거나, 신뢰의 표상이 되는 지도자가 새로운 유능함의 주인이 될 것이다. G2 역시 이를 찾고 실현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듯 하다.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이념으로만 본다면 두 나라가 지향하는 신뢰의 이념을 얼핏 추측할 수 있다. 미국은 평화와 다자주의인 것 같고, 중국은 증오와 엘리트주의인 것 같다. 미국 자본과 중국 자본이 들어간 콘텐츠 속 서사의 전개 양상을 보면 대개 이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중국 자본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철인왕후> 주인공은 늘 화가 나있고, 자신을 함부러 대하는 자를 응징하기 위해 싸운다. 증오가 원동력인 것이다. 극의 모든 갈등은 미래에서 온 그(그녀) 1명에 의해 전부 해소되는 데, 엘리트주의가 느껴진다. <빈센조>, <킹덤 아신전>도 비슷한 전개 양상을 띈다.


믿음을 의심으로, 의심을 분노로, 증오로 바꾸는 게 정의라고 믿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런 세상에서 능력이란 강한 증오와 분노가 아닐까? 그래서 전체주의 국가들은 계속 군사 위협을 일으키고, 집단 내 혐오를 부추기는 민주 국가의 정치 리더들을 지원하는 것일까? 2016년 유럽과 미국에서는 우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혐오 정치가 벌어졌다.


중요한 것은 우연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결국 유럽과 미국은 혐오 정치를 물리치고 다시 화합과 치유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이다. 화합과 치유는 다시 한번 인간을, 이웃을 믿겠다는 것과 같다. 인류는 왜 항상 배신하는 법이 없는 증오가 이닌 늘 배신 때리는 신뢰를 믿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문제는 증오의 힘을 대부분의 인류가 신뢰하게 만드는 발상 자체가 아닌가? 이는 '연목구어'적이다.


증오는 현재의 영역이다. 신뢰는 미래의 영역이다. 증오는 육체적 힘을 필요로하지만, 신뢰는 이성적 전략을 필요로 한다. 증오를 믿으면 상대보다 더 큰 힘을 바라지만, 신뢰를 믿으면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하려 하는 것이다. 증오는 필연적으로 네 편 내편의 사회의 분열을, 신뢰는 우리를 지향하는 사회의 통합으로 나아간다. 사회적 인간에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쪽은 어디일까?


증오가 야기하는 약육강식 체제는 얼핏 보면 지구의 법칙 같다. 그러나 공룡이 지닌 거대한 힘은 물리적으로 지구가 견디지 못해 망했고, 그보단 아래인 맘모스같은 동물의 힘은 인간이 머리를 써서 정복했다. 우리가 머리 쓴 능력이란, 이질적인 존재 간 협력을 이루도록 하는 '신뢰'다. 즉, 힘에 싸우기 위해 '신뢰'를 개발한 것이고, 도구를 쓰는 기술이나 전략 등 부가적 요인은 이 신뢰가 없다면 공동체의 무기로 쓰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뢰는 힘과 약육강식의 반대말일 것이다. 


그런데 전체주의 국가들은 증오가 필수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적 힘을 믿음과 같은 부류로 보고, 많은 사람들이 '힘' 자체를 신뢰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류는 힘을 신뢰로 눌러오는 경험을 쌓으며 이 둘은 정반대 영역의 개념임을 계속 확인해왔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인간일지라도, 경험을 통해 진화한다는 다윈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뾰족하고 높은 곳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것처럼, 증오보단 신뢰가 더 옳다는 감각은 우리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한번 증오의 힘에 혹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믿거나 행동으로까지 표출하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과 미국은 다시 화합의 정치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증오를 사회적 신뢰로 믿게 만들려는 정치적 시도는 연목구어가 아닌가?


그러나 증오를 믿음으로 만들려는 세력은 강력해 보이고, 돈 다음에 새로운 신뢰의 구체적 형태는 아직 어떤 지도자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며, 심지어 신뢰를 추구하는 지도자들조차 때론 '신뢰'의 매직을 믿지 못하고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감각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모든 지도자들의 능력을 불신하게 되며 결국 능력주의, 능력자 자체에 대한 불신만 커지는 건 아닐지?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능력주의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능력주의의 구체적 모습이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어떤 능력에 어느 정도의 보상이 적절한가가 문제인 것이다


새로운 우리의 정치 지도자가 새로운 신뢰를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무능력자인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뢰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 인간 고유의 유산이며, 증오를 압도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새로운 신뢰 체계가 나타날 때까지만이라도 당장 이 신뢰라는 감각이 옳다고 지켜줄, 투박한 평화라도 강하게 주장해줄 리더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하지 않을까?


신뢰를 무너트리려는 네거티브, 증오에는 인간과 평화에 대한 압도적인 신뢰, 포지티브로 맞서야 한다. 어쩌면 이번 우리나라 대선은 우리 사회가 증오와 증오로 맞붙는 '인피니티 워' 체제로 나아갈지, 평화와 통합을 지향하는 '엔드게임' 체제를 열 것인지 사이의 '선택'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인피니티워의 주최자는 뚜렷한데, 엔드게임 리더의 모습은 불분명하다. 오히려 민주화의 주역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눈눈이이'라며 악을 악으로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이니.. 때론 '눈눈이이' 전략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먼저 사람들에게 자신이 민주적이란 신뢰를 얻은 후 통합의 힘을 얻은 다음 '눈눈이이'하는 게 순서다. 언제쯤 정신 차릴까?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힘을 지키고 싶다면, 자신이 쥔 힘의 본류를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자꾸 능력을 의심 받기 싫다면, 민주적이고 평화를 지향하는 지도자로 군림하고 싶다면, 자신이 엔드게임에 적합한 지도자임을 확실히 보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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