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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Aug 23. 2021

영원 회귀적 정치

1년 전 작가의 서랍 속 글

브런치는 작가가 3주 간 글을 안 쓰면 알람을 보낸다. 요즘은 별로 쓰고 싶은 말이 없어서, 괜히 작가의 서랍만 뒤적였는데, 요즘 같은 시기에 적합한 주제의 글이 있어서 올려본다. (그나저나 내 글쓰기 능력은 왜 이때보다 퇴화했는지..ㅎ) 



-2020.4.8.

공보물이 오는 시기이다. 예전보다는 시사 지식이 좀 쌓였다고 괜히 우쭐해하며 공보물들을 꼼꼼히 살폈다. 먼저 지역구 후보. 소수정당 후보를 제외한 두 거대 당의 후보자들은 공약만 놓고 봤을 땐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동네 시설을 개선한다, 교통을 편리하게 하겠다, 그리고 지역의 어떤 큰 현안을 해결하겠다 정도인데, 마지막에 그 큰 현안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그나마 차이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해당 이해관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공약으로만 볼 때 두 후보자간 차이는 찾아 보기 어려웠다. 결국 투표는 해당 후보자의 이력, 정당 등 배경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뒤에 비례정당을 봤다. 초록색 당이 내세운 슬로건은 그럴 듯 했으나 추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핑크색은 경제 파탄으로 시작해 현 정책 파괴로 끝났고, 파란색은 문으로 시작해 지킴으로 끝났다. 오히려 공약만 보면 파란색이 보수(수호), 핑크색이 진보(갈아엎기) 같기도 한 기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현 대통령과 탄핵된 대통령의 사진이 왜 국회의원 선거 공보물에 대문짝만하게 실려있는 건지. 당사자 동의 없이 게재하는 건 ‘도용’ 아닌가? 아님 그분들이 모두 동의를 해주신 건가. 이해할 수가 없다. 그외 소수정당들은 다소 명확한 공약을 제시했지만 이들이 과연 이걸 이뤄낼 정치적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의도가 선하고 능력까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무니까. 어쨌든 정치는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갈등을 조정하고 협의를 이끌어 낼 테니까. 그러한 능력이 없는 권력은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다.


공보물을 다 보고나자 문득 작년 mbc 특별기획 <2019 국민과의 대화, 국민이 묻는다>가 떠올랐다. 300인의 국민이 1명인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정책 질의라는 형식으로 쏟아내던 장면. 민식이 부모님의 스쿨존 문제부터 탈북자, 성소수자, 장애인 등등 너무도 일상적이고 마땅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에 처했음에도 법의 사각지대 혹은 구태에 의해 억울한 사연이 대부분이었다. 대통령은 문제 의식에 공감만 해줄뿐 해결을 약속하진 않았다. 그럴 수밖 없었던 건, 대부분이 ‘입법’ 혹은 ‘법 개정’으로밖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닌 공보물에 나온 그 국회의원들만이 풀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공보물을 보고 나자 작년에 전파를 타고 피부에 와닿았던 그 절절한 문제 의식들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린 느낌이었다. 늘 그랬듯 잊혀지고 무시 당할 것 같다는 강한 예감. 평범한 나한테조차 아무런 실익이 없는 프레임과 어느 대학 나오고 무슨 일 했는지만 써있는 비례 후보자 프로필에는 표를 갈망하는 감성만 있을 뿐 정치는 없었다. 표준 국어사전에 ‘정치’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라고 나온다. 한 문장에 쉼표가 두 번이나 들어갈 정도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한 ‘정치’인데, 실제로 정치인의 정치란 저 긴 문장 속 ‘권력 획득과 유지’에만 국한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핑크색은 과거 정권 심판을 받았음에도 현재를 비판하며 다시 과거 정책으로 회귀하겠다고 한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파란색은 코로나 말고는 별다른 성과가 없으니 대통령 팬덤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보며 그들 반대편 세력이 과거 몇십 년 동안 해오던 정치 전략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던 혹자의 말이 떠오른다.


특히 지금 거대 양당의 프레임 싸움은 기시감마저 든다. 70년 전 남과 북으로 싸우던, 30년 전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눠 싸우던 모습과 뭐가 다른가. 그게 ‘구식’이라면, 대통령을 놓고 지킬 건지 무너트릴 건지를 놓고 싸우는 건 ‘신식’인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늘 봐왔던 패턴의 반복이다.


공보물을 다 보고 나서 조심스레 가까운 친구에게 투표를 할 거냐고 물었다. 친구는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비례정당이 너무 많아 누굴 찍을지 모르겠다며, 내게 각 정당이 어떤지 되물었다. 나는 그냥 공보물을 보고 알아서 판단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근데 그걸론 별로 판단할게 없을 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친구가 누구의 생각도 듣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투표로 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혹시 사표가 될지라도, 진짜 민의가 반영된 표들이 모여 특정한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정치도 제 모습을 찾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흘러가는 정치가 옳은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권력 싸움에 휘말려 쓸데없이 시민들이 길거리에 동원돼 서로를 미워하며 대리 싸움하는 식의 ‘희생’은 멈추지 않을까 싶어서. 제발 뭐든 진짜 민생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이번 선거에서는 보여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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