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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Feb 17. 2023

줄 끊어진 연이 아닌, 새로운 연줄로

세상 떠난 아버지, 마음 편히 가족들 기다릴 수 있게

 여느 때처럼 중순쯤이 되자 머리를 자르러 단골 미용실을 방문했다. 회사를 퇴사한 후 꾸준히 다녔으니 벌써 3년 가까이 다닌 미용실이다. "어서 오세요." 홀로 운영하는 미용실의 주인분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유 이제 봄인 줄 알고 옷을 얇게 입었더니 감기가 걸린 것 같아요." 말수가 별로 없는 나는 미용사 분의 말에 "네. 아직 춥네요"라며 간단하게 인사를 대신했다.


 평일 오후 비교적 여유 있는 시간대에 미용실을 찾는 편인데 미용실에는 짧게 머물고 싶어서다. 같은 돈을 내고 머리를 자리더라도 샴푸를 하지 않고 툭툭 털고 나오는 이유도 같다. 그럼에도 이 미용실의 단골이 된 것은 처음 방문 때부터 반갑게 인사해 주신 미용사 분 때문이었다. 굳이 어떻게 머리를 해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머리를 자르면 흡족하게 마음에 드는 곳이다.


 한참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미용실에 들어왔다. "저기 차 좀 빼주세요." 그분의 말에 미용사 분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라고 말했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나는 흔쾌히 "괜찮다"고 말했다. 미용사 분이 나간 후 밖에서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중환자실에 계신다"라고 말하는 대화가 들렸다. 문이 닫혀 있어도 남의 말은 그렇게도 잘 들렸다.


 "어휴 죄송해요. 갑자기 급하게 가실 곳이 있다고 하셔서." 따스한 온기가 도는 미용실 안에서 잠깐 졸음이 왔던 나는 다시 웃어 보였다. '죄송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무언의 미소였다. 다시 가위를 잡은 미용사 분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이 건물 주인 할머니가 3층에 거주하시고, 자식분은 2층이 사세요. 며칠 전에 응급차가 와서 구급대원분들이 위층에 올라가더라고요? 알고 보니 주인 할머니가 식사를 하시다가 의식을 잃어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으시대요."


 차를 빼달라고 하신 분은 주인 할머니의 딸이었다. 아마도 오후에 잠깐 집에서 와서 쉬다가 다시 병원으로 가는 길 같았다. "정말 저희 엄마 만날 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한다'고 말해요. 항상 '엄마 떠나면 나는 줄 끊어진 연이 된다'고 해요." 미용사 분은 응급실에 실려가는 할머니를 보면서 떨어져 사는 어머니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미용사 분의 말을 들으면서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갔다. 줄 끊어진 연. 멀리서 볼 때는 자유롭게 바람을 타고 나는 듯 보이는 연이지만, 줄을 당기거나 풀는 것에 따라 연의 높이도 달라진다. 연은 줄이 있어야 시작과 끝에 제자리로 돌아간다. 짧은 말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실 아버지가 작년에 코로나로 돌아가셨어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친구나 지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미용실 단골이긴 했지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사적이고, 남들에게도 유쾌하지 않은 주제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왜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줄 끊어진 연'이라는 표현이 내 마음에 와닿아서였을 것이다.


 "아이고. 어떡해요." 미용사 분은 머리를 자르다가 잠시 말을 잃었다. "이제는 괜찮아요. 저보단 어머니가 많이 힘드시죠. 작년 4월쯤에 돌아가셨어요." 시간이 흘러서일까. 이전에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올랐는데 이번에는 담담했다. 줄 끊어진 연. 그 표현이 마음에 계속 맴돌았다. "그때 저도 코로나에 걸렸는데…그러고 보니 벌써 1주기가 거의 다 돼가네요?" 미용사분의 말에 정신없이 살아가는 동안 벌써 아버지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봄바람이 스미던 지난해 4월. 아버지가 떠나가고 그 이후의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더 일에 매달리며 정신없이 살아서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삶은 확실히 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어머니와 여동생.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이라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상황이 바뀌면 나도 바뀌어야 한다'라고 마음속으로 이따금씩 다짐했다.


 "그러네요. 시간 참 빠르네요." 어느새 미용사분이 옆머리 마무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답했다. 처음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는 머뭇거렸지만 다음 대화들은 막히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이런 상황들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다 자르고, 평소와 같이 머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계산을 마쳤다.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항상 행복하시고요." 미용사 분은 미용실에 들어올 때처럼 친절하게 인사해 주셨다.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언제나처럼 만족스럽게 머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줄 끊어진 연. 부는 바람에 속절없이 방향을 잡지 못한다. 하지만 꼭 내가 연이어야만 할까. 줄이 없다면 내가 줄이 되면 된다.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와 여동생도 점차 줄에 매달린 연이 아닌 단단한 연줄이 돼가고 있다. 이제는 서로가 연이자 연줄이 돼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견디면 된다. 그리고 새로운 연을 만들어간다면, 나도 내 자식의 줄이 된다면…아버지도 나중에 다시 만날 때까지 마음 편하게 쉬고 계실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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