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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홉수 Aug 30. 2023

수많은 단어 중 '아빠'가 별처럼 사라졌다

누구보다 외로웠을 '아빠'

 "이제 네가 가장이야."


 아버지 장례 치른 지 이틀째 되던 날 장례식을 함께 지키며 조의금을 받아주던 친구 녀석이 말했다. 조문객들이 없는 오후, 그나마 눈물이 그칠 만한 시간대였다. 아직 봄이었는데도 햇살은 따가웠다.


 "가장은 무슨… 어머니도 계시고, 동생도 있는데."


 아버지가 가족 곁에 있을 때도 따로 '가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진 않았. 아버지는 아침이 되면 일터에 나가셨고, 저녁이 되면 어머니와 집에 돌아오셨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가장'이라는 단어는 지금처럼 타인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다.


 "어머니랑 동생 잘 보살펴야지.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응. 그래. 셋이 잘 살아야지."


 코로나19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나와 가족들은 아직 작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아버지를 한 달 만에 떠나보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기도, 마음이 상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던 상대의 온기 없이 안치실에 누워있었다. 가장은 그렇게 떠나갔다.


 "장례 끝나면 머리 염색도 좀 해야겠네."

 "아 그래? 벌써 염색할 때가 됐나."


 조문객을 받기 전에 같이 담배를 피우던 친구가 내 머리를 보고 말했다. 스무 살 때부터 조금씩 생기던 새치가 서른 중반이 되니 부쩍 늘었다. 아버지 또한 항상 동년배들보다 흰머리가 많았다. 검은 머리카락에서 삐죽 튀어나온 새치처럼 인파 속에 있어도 아버지 지인분들은 내 얼굴을 보면 아버지를 떠올렸다.


 상을 치르느냐고 세수도, 머리도 감지 않은 채로 있다 보니 새치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단지 '검은 상복을 입은 내 머리에 흰 새치가 튀어나와 조문객들이 멈칫하진 않을까'라고 엉뚱한 생각이 스쳐갈 뿐이었다. 




 지난 1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 둘 다 살갑게 대하는 방법을 모르던 부자였는데, 한 명이 떠나가니 그 아쉬움이라도 털어내 듯이 자다가도 눈물 흘리며 눈을 떴다. 


 어머니는 홀로 아버지와 운영하던 간판 가게를 꾸려가고 계신다. 주변 분들은 현장 일이 많은 간판 가게를 어머니가 접으실 줄 알았으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버지와 함께 했던 생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아빠 친구가 당진에 공장을 짓는데 그쪽 간판을 좀 해달라네."

 "당진? 가게에서 너무 먼데…."

 "요즘에 일도 없어서 견적이나 한 번 보고 오려고. 혹시 그날 시간 괜찮으면 같이 갔으면 싶은데."

 "…."


 아버지가 독한 약물 치료 때문에 마취 상태에 있을 때 병문안을 온 친구가 있다. 아버지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고향에서 살갑게 지내던 분이라고 했다. 동생이 몇 년 동안 아버지 친구분 회사에서 일한 적도 있을 정도로 두 분은 각별했다. 사업을 하시는 그분은 며칠 전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서 자신의 공장에 간판을 달아달라고 요청하신 모양이었다.


 "간판을 해놨다가 수리할 일 있으면 당진까지 가야 하는데. 너무 멀지 않아?"

 "그렇지? 그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네."


 짧은 대화로 이 일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어머니는 일을 도와주시는 분과 다음 날 아침 일찍 당진을 다녀오신다고 말했다. 가게에서 홀로 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시라고 하고 싶었다. 언제나 말은 목구멍에서 걸리고 말았다. 그동안 아버지가 받아놓은 사업자 대출을 어떻게든 갚아야 할 상황이어서였다.


 "너무 멀다니까…."

 

 청소년기 때부터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꼭 해버리는 성격이 아버지를 닮은 줄 알았는데, 요즘에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도 아버지나 어머니나 서로 비슷한 성격이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너무 멀다는 말 한마디를 뱉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도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아들이 서운한지 말문을 닫으셨다.


 '내가 정말 가장일까.'


 지난 1년 동안은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 어색했다면, 요즘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말없이 가족을 꾸려왔는지 실감하고 있다. 꼭 남자라서, 아들이라서 가장이라는 건 아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힘들었던 일이나 남의 집에서 생긴 안 좋은 소식들을 곧잘 말한다. 어머니의 힘든 일을 들어주고, 남의 집 이야기를 할 때도 가만히 듣고 있는다. 가족들에게 사소한 얘기까지 하는 것이 어머니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일 테니까.


 그렇다고 나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짊어지진 않는다. 어머니나 동생이나 각자의 방식대로 아버지가 없는 가족의 삶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서로가 속내를 다 털어놓지 못하면서 서로를 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 술 좀 그만 먹으라니까."

 "어제 안 마셨으니 오늘은 좀 마셔도 괜찮지 뭐."

 "어이구. 속 터져."


 아버지는 일이 끝나시면 거실에서 TV를 보시면서 저녁에 먹었던 반찬에 소주를 드셨다. 동생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집에서 술을 드시는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는 건강검진받으시기 전에만 술을 줄이셨고, 어머니와 동생의 핀잔에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셨다. 그때만 하더라도 조기축구도, 배드민턴 동호회 모임도 하시던 아버지가 코로나19 폐렴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실 줄 몰랐다. 이제서야 '아버지한테 술을 좀 그만 드시라고 할걸'이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면 후회가 밀려오곤 한다. 일을 끝내시고 술잔을 기울이시던 아버지는 홀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마도 하루 해가 넘어가는 저녁쯤 '가장'이라는 단어가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진 않았을까. 아내와 자식들의 불만과 핀잔 속에서도 어떻게든 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그 무게감. 나는 아직 알 길 없지만 저녁이 될 때쯤 혼술이 가끔 생각나면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아빠 같이 가자니깐!"

 "빨리 와."


 세상도 낮잠을 자는 듯한 한산한 일요일 오전. 길을 걷다가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아빠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모습이 들어왔다. 산책을 가는지, 아니면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가는지 부자는 길을 가면서도 티격태격했다. 


 태어날 때부터 입에 붙었던 단어 중에 하나가 '아빠'였다. 서른 살이 넘을 무렵부터는 집 밖에서는 '아버지'라고 불렀지만, 집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아빠'라고 나도 모르게 부르던 마법 같은 단어다. 어느덧 별처럼 수많은 단어 중에 '아빠'라는 단어를 부를 일이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더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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