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선명히 기억하려고.
강원도 어느 깊고 깊은 산골, 이름 모를 푸른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내린천이 흐르는, 개 한 마리, 토끼 두 마리, 물푸개 하나 놓인 아담한 마당이 있는, 소마구에 어미 소 새끼 소 나란히 서서 소똥 냄새 푸지게 풍기고, 가마솥 아래 장작불이 꺼지지 않는 집.
그곳은 저의 외가이자 칠십 년 전 엄마가 여덟 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곳이죠.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저의 외할머니는 피부가 붉게 부어올라 육고기를 드시지 못했는데, 그 때문인지 체형이 아담하다 못해 왜소했어요. 그럼에도 그 작디작은 몸으로 여덟 명의 자식을 낳아 소키우고 농사지으며 그중에 한 아이를 잃고 일곱 자식들은 모두 무사히 길러냈지요. 그 엄마를 닮아 육고기를 못 먹는 우리 엄마는 중학교까지 학업을 마치곤 동생들 돌보며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농사일도 도우며 살아갔대요. 그리고 스므살이 넘자 다른 마을 청년에게 시집을 갔지요. 그 당시 엄마는 공무원이었던 남자와도 선을 봤지만 자신에게 공무원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농사꾼인 아빠를 선택했대요.
아마도 아빠가 잘생겨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엄마가 그렇다니 그런 걸로 할게요.
고작 스믈 네다섯의 볼이 통통하고 하얗던 어린 숙녀는 잘생긴 농사꾼 청년과 결혼하여 이듬해 눈이 많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첫 아이를 출산했지요. 그런데 아기 엄마가 되자마자 시어머니가 암투병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오리지널 K 장녀인 엄마는 하필 오리지널 K 장남을 만나 시부모님을 모시며 육아와 병간호를 동시에 해야 했죠. 겨울에 태어난 아기는 방이 추웠는지 매일 자지러지게 울었고, 시어머니의 피빨래는 엄마 앞에 쌓여만 갔죠. 우는 아기를 포대기로 업고 언 빨래터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했대요. 아기 낳은 지 백일도 안 된 산모는 아기를 둘러업은 채 찬물에 두 손을 담그고 옷감을 치댔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손목으로 있는 힘껏 무겁게 젖은 빨래들을 짜서 탁탁 널어야 했죠. 세탁기는 있을 리 만무하고 아기도 당연 천기저귀를 사용했으니 하루종일 빨래만 해도 기진맥진했을 텐데 가족들 삼시 세끼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었죠.
어린 엄마는 아마도 추운 빨래터에 쪼그려 앉아 혼자 많이도 울었겠죠? 창백한 볼에 흘러내린 눈물방울은 냇가에서 튀어 오른 물이 간신히 씻어주었겠죠? 외할머니의 삶이 그랬듯 우리 엄마도 가족들 밥을 챙기며 자식들을 길러내는 삶에 자신의 한평생을 바쳤지요.
암투병 끝에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삼 남매를 기르기 위해 아빠와 함께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밭이며 논이며 흙속에 손발을 파묻고 일을 했어요. 지독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새하얗던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리고 눈망울까지 흘러내린 땀 때문에 눈을 뜨기 조차 힘든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남의 손 안 벌리고 자식들 부족함 없이 먹일 수 있는 이 값진 노동이 싫지 않았대요. 자식들 예쁘게 커가는 맛에 점점 일을 늘리니 엄마 아빠는 더 더 더 일찍 새벽을 맞이하고 부지런히도 살아갔지요. 일손은 늘 부족했지만 엄마도 아빠도 혹여 자식들이 공부 안 하고 농사짓겠다고 할까 봐 농사일은 기필코 거들지 못하게 했지요. 농사는 물론 고귀한 일이지만 너무 고된 일이라 자식들은 그저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서 일했으면 했다네요.
어린 시절 언니와 저는 방학이면 외가에 보내졌어요. 남동생은 너무 어려서 제외되었고요. 갓난쟁이 아기를 업고 산더미같이 쌓인 빨래를 하고 있는 엄마를 외삼촌이 발견하고는 집에 가서 ‘이러다 우리 큰누나 죽는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외할머니가 몇 년간 마음만 졸이다 엄마에게 아이가 하나 둘 더 생기자 애들이라도 보내라고 하셨대요. 이런 사연도 모르고 저는 방학 때마다 외가에 가서 친척 언니 오빠들과 놀았던 기억이 무척이나 좋았어요. 요즘으로 치면 시골 한달살이! 물론 제가 살던 집도 시골에 있었지만 더더더 깡시골에서의 한달살이는 신나고 재밌는 체험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러나 작은 체구의 외할머니는 생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우리의 외가 한달살이가 끝남과 동시에 엄마에겐 엄마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힘든 농사일, 육아, 집안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이 모든 힘듦을 받아들이며 엄마는 삼남매를 키워냈어요. 틈틈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젊음을 기꺼이 보내주고 늙음을 서러워하지 않는 할머니가 되었어요.
칠순을 맞이한 엄마에게
지금에서야 고백하자면 엄마에게 미안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어요. 중학생이던 저는 친구들과 하교를 하다 저 멀리서 밭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 보았어요. 친구 한 명이 제게 “야, 너네 엄마 아냐?”하고 물었는데 저는 “잘 안 보여서 모르겠는데 “하고 엄마를 못 본 척 그냥 지나쳐 왔지요. 시꺼멓게 그을린 얼굴로 흙을 묻히고 밭일을 하고 있는 엄마를요.
지금이라면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신나게 뛰어가서 엄마를 놀라게 해 줄텐데. 옆에서 재잘거리며 귀찮게 말을 시키고 같이 흙을 뒤집어쓰고 일을 거들텐데. 일 좀 덜 하라고 잔소리할 텐데 말이죠.
미안해요 엄마.
저는 마흔이 가까워 드디어 엄마가 되었네요.
엄마, 엄마의 엄마. 나의 엄마
엄마가 살아온 인생을 그저 버텨냈다고 쉽게 말하지 않으려고요. 절대 평범하지 않은 엄마의 삶은 다양한 빛깔로 엄마에게 기억되어 있겠죠. 결코 단순히 버텨내야만 했던 삶은 아니었을 거예요. 감히 몇 마디 말로 엄마의 삶을 판단할 수 없지요. 칠순을 맞이한 엄마를, 엄마의 삶을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해 봤을 뿐이에요. 자꾸만 밤잠에서 깨는 아기를 안고 핸드폰으로 글을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날 뿐이에요. 슬픔도 안타까움도 아닌 한없이 대단하게만 느껴지는 엄마의 삶을 생각하며 엄마를 더 선명히 기억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