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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Apr 29. 2024

찢어진 신발

일상기록

어제는 집 근처에서 장강명, 정아은 작가의 북토크가 있어서 남편과 다녀왔다. 나가면서 보니 밍기는 새로 산 보풀제거기로 양말들의 보풀을 없애느라 바빴다. 워낙 결벽에 가까우리만치 깔끔을 떨어대는 녀석이라 그러려니 했다.


북콘서트가 끝나고 백화점에 들러 볼일을 본 후 귀가했다. 건명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밍기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워낙 눕는 걸 좋아하는 애라 그런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죄송해요"


분위기가 꽤나 심각해서 나는 옷 갈아입는 것도 잊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야기인즉 녀석에게 얼마 전 사준 나*키 운동화 안에 뭔가 끈적거리는 게 있기에 없애보려고 힘껏 잡아당겼더니 운동화가 크게 찢어지고 말았다는 거였다. 이야기를 듣고 밍기 방에 가 보니 양말과 보풀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내가 사준 보라색 새 운동화는 한쪽 옆이 크게 찢어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방을 그렇게 너저분하게 하는 녀석이 아닌데 아마 운동화 사고 때문에 패닉에 빠진 나머지 방을 치우지도 못한 것 같았다.


운동화가 심하게 망가진 건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운동화보다 아이 마음이 먼저였기에 서둘러 안방으로 돌아갔다. 밍기는 대성통곡을 하며 말했다. "이제 신발 한 켤레로 살래요. 나같은 건 신발을 살 자격이 없어요 " 평소 신발 욕심이 많아서 밍기는 나이에 비해서는 갖고 있는 신발이 제법 많았고, 그래서 나는 녀석을 "너 지네냐? 발이 그렇게 많아?"라고 놀리기도 했는데 그런 녀석이 신발 한 켤레로 살겠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충격의 크기가 대강은 짐작이 되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네가 얼마나 신발을 아끼고 소중히 관리하는지 안다. 이번 사고도 신발 관리하다 그렇게 된 거 아니냐.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자책할 필요 없다. 여자들도 몇백만원씩 하는 가방이나 옷 관리를 잘못해서 수선하거나 심지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배움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번 일로 또 한번 크게 배웠다고 생각하면 된다. 엄마는 신발보다 네 마음이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다.


녀석은 그 후로도 조금 더 울다가 차차 진정되었다. 신발 전용 클리너까지 사서 주말이면 신문지 깔아놓고 신발을 그 위에 올려다가 돌아가며 번쩍번쩍하게 닦는 녀석인데 흙이 별로 묻지도 않은, 그것도 꽤나 아끼는 새 신발이 그렇게 허무하게 찢어져 버렸으니 얼마나 놀라고 충격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새삼 녀석이 짠했다.


녀석에게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털고 잊자고 이야기하고 달래면서 나는 문득 나에게도 이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과거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다. 그게 나를 아프게 하고 갉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놓지를 못한다. 밍기의 신발이 예기치 않은 사고로 찢어졌듯이, 나를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들도 어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현재의 나와 좌악 찢어져 단절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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