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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26. 2024

민원에 대한 단상

일상기록

열흘 남짓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나는 우리나라와 다른 점을 몇 가지 발견했다. 내 직업 때문에 그럴수도 있겠는데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는 게 재밌기도 했다. 발견했던 점을 간단히 써 보면 이렇다.


1. 경찰차 또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매우 크다

유럽 거리를 걸으면서 경찰차나 구급차가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달리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처음에 그런 차들을 보고 놀랐던 것은 사이렌 소리가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소리가 크고 선명하고 우렁찬지 아주 멀리서도 지금 경찰차(또는 구급차)가 출동 중이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 크기로 우리나라 거리에서 사이렌을 울린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니 곳곳에서 시끄럽다며 민원이 폭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특히 주택가나 학교, 학원가에서 "시끄러워서 우리 애 공부 못하잖아욧!" 하는 항의가 빈발할 것이 분명했다. 위중한 외상환자를 신속히 이송하기 위해 도입된 '닥터헬기'도 소음으로 민원 대상이 되고 있으니 그보다 출동 빈도가 잦을 경찰차나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만큼 크면 얼마나 많은 민원이 관공서로 접수되겠는가. 물론 사이렌 소리가 동네방네 다 들리도록 쩌렁쩌렁한 것만이 정답은 아니겠으나, 나는 닥터헬기가 출동 소음 때문에 민원에 시달렸다는 기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위급상황에서 울려야 하는 사이렌 소리가 더 커질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위험한(?) 구조물 설치가 자유롭다

바르셀로나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구경하다 특이한 건물을 보았다. 건물 위에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구조물이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

건물 위에 공 모양 구조물이 떨어질 듯 올라가 있다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로변에 공 모양 구조물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정말 특이해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는 이 건물을 보며 아마 한국에서는 이렇게 지은 건물을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건물 꼭대기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는 공을 보라.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저 공이 결국 철거되고 말 때까지 건물 관리 부서는 민원에 죽도록 시달려야 할 것이다. 시내에 저런 건물이라니 제정신이냐! 떨어져서 사람 죽거나 다치면 어쩔 것이냐! 저렇게 위험해 보이는 구조물은 누가 허가한 것이냐! 담당 공무원을 모조리 징계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은 저 구조물 제작과 관리에 관한 10년치 문서 일체를 내놓으라고 하겠지. 아..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비단 건물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관공서는 구조물을 설치할 때마다 설치자와 미적 감각을 달리 하는 시민들의 민원에 시달리게 된다. 모두가 만족하는 작품은 애시당초 존재할 수가 없는데, 우리나라는 정부부처나 지자체나 민원 발생 그 자체에 벌벌 떠는 분위기가 강해서 단 한 건이라도 민원이 생기면 민원 대상 작품은 철거 위기의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 만드는 게 현명할 지경이다.

밤에 보면 무섭다는 민원이 제기되어 자리를 옮긴 일명 '국세청 저승사자'. 이건 진짜 좀 무섭긴 하다

3. 상점의 직원들이 계산하면서 노래를 한다

여행하면서 기념품 등을 사기 위해 쇼핑을 좀 했는데 계산대에 서 있는 직원들이 가게에 틀어놓은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직원이 손님의 물건을 계산해 주면서 노래를 부르는 건 못 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낯설고 이상했다. 그런데 어느 가게를 가도 그러고 있으니 어느새 적응도 되고 그들의 그런 여유가 좋아보이기도 했다. 마침내 나는 바르셀로나의 한 가게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 직원에게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해 주었고, 그녀는 활짝 웃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우리나라에서 직원이 계산하면서 그랬다가는 손님으로부터 계산이나 빨리 하라는 타박을 받기 쉬울 것이다. 직원이 손님을 예의있게 응대하지 않는다며 사장에게 직접 항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직원이 손님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는 게 맞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이건 어쩌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건 아닐까.


나는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택시 외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고, 공무로 국외출장을 간 것도 아니라서 그 나라 관공서를 가보지도 않았으니 더 자세한 건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라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 일들이 내가 가본 나라에서는 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그런 일들이 적어도 '진상 민원'의 대상이 아님은 분명해 보였다. 행정을 하면서 민원이 없을 수는 없으며, 행정의 목적 중 하나는 국민 또는 시민의 불편을 해결하고 편의를 증진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민원이 행정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공무원의 적극적인 업무수행을 촉진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을 한참 넘어서 행정을 마비시키고 급기야 공무원을 숨지게 하는 민원(?)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요즘 민원은 '숲세권' 아파트에 살면서도 벌레는 싫으니 없애 달라는 식이라는데, 공무원은 전지전능한 신이나 호그와트 출신 마법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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