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2, 진실을 가리는 나쁜 환상

끔찍한 화해와 오만한 인간의 노래

by 구윤숙

난 본디 담이 약해 공포물과 잔혹극을 잘 못 보고 체력이 없어 예술 영화를 보는 것도 좀 힘들다. 그래서 전체관람가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끝까지 보기 힘든 전체관람가 영화를 만났다. 한 때 한국의 스크린을 88%까지 이상 삼켜버렸다는 겨울왕국 2. 제목 그대로 영화계를 동토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의 왕국만 배 불리고 있다. 디즈니는 자신이 노래하는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정면에서 배반했다.


(결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도 심각하다. 요약하자면 이건 환경 재난 영화다. 엘사가 사는 아렌델 왕국의 땅이 흔들리고 마법의 숲에서 이상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과거에 숲 속에서 사는 평화로운 부족 노덜드라 사람들을 위해 아렌델의 왕이었던 엘사의 할아버지가 우정의 선물로 댐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실은 숲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엘사와 안나는 서로 도와 댐을 부수고 자연 재앙을 해결한다. 이렇게 한두 명의 영웅이 특별한 기술로 환경 문제를 해결한다는 환상은 진실을 가린다. 환경 문제는 마법 같은 기술이 아니라 탄소 배출량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엘사는 왕이다. 그녀의 힘은 진화했다. 하지만 정치력이 없다. 정치의 기본은 사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아렌델 사람들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 여길 뿐 동등한 협력자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문제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국을 구하겠다는 왕이 이래선 안 된다. 그 옛날 공자는 전쟁에 나갈 때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겠다는 사람과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장수는 적을 상대할 수 없다. 대신 공자는 일을 시작할 때 반드시 두려움을 알고 성취할 수 있는 사람과 가겠다고 했다. 거사를 이루기 위해선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무모한 개인이 구할 수 있는 세계는 없다.


엘사의 힘에 제압되는 물의 정령 - 이 물의 정령은 엘사의 애마가 된다. 이런~~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3004]

다행히 엘사에겐 마법의 힘과 동생 안나가 있었다. 폭주하는 숲의 정령들은 얼음의 힘으로 제압하고, 동생 안나의 도움으로 땅의 정령인 거인들을 움직여 댐을 파괴한다. 엘사가 제압한 불의 정령은 귀여운 애완동물이 되고, 바람의 정령은 자매의 편지 배달부가 되고, 물의 정령은 그녀가 타고 다니는 말이 되었다. 디즈니가 상상한 자연의 힘은 그렇게 인간이 제압하여 부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의 정령(힘)을 제압하는 전개는 진정 오만해 보였다. 현실은 다르다. 기후변화로 산불과 홍수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자연재해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수가 전쟁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수를 넘어섰다.


엘사의 동생 안나도 무모하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엘사를 이어 아렌델의 왕이 되지만 역사를 교묘히 왜곡하는 정치가가 되었다.


엘사가 모험을 통해 밝혀낸 진실은 자기 할아버지가 노덜드라와 영원한 우정을 맺기로 한 날 상대 부족의 추장을 죽이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숲의 정령들이 분노했고 사람들을 안개에 가두었던 것이다. 그 전쟁 중에 숲 속에 살던 한 소녀가 아렌델의 왕자를 구해 나왔다. 그 소녀와 왕자가 두 자매의 부모님이다. 왕위를 물려받은 안나는 전쟁중에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을 기념하여 광장에 노덜드라 소녀와 아렌델 왕자가 함께 있는 동상을 세운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그 동상 제막식이 좀 끔찍해 보였다.


우정을 가장하고 상대의 등에 칼을 꽂았던 아렌델의 광장에 세워진 아름다운 사랑의 기념비. 그건 전쟁의 아픔과 고통이 아니라 우정만을 기억하자는 가해국의 정치 선전물일 뿐이다. 내가 식민지 조선의 후손이어서 순수한 아이들 영화를 삐딱하게 보는지도 모른다. 내가 달러를 벌겠다고 자국민을 베트남전에 보내 민간인의 학살자가 되게 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암튼 난 그런 학살 장면에서 사랑만 건져내는 정치가 안나가 무섭다.


노덜드라 사람들은 전쟁 중에 많이 죽었고 그 후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푸른 하늘도 못 보고 안개 속에 살았다. 그런데 사과는 없고 우정만 있다? 이런 평화가 가능한가? 그리고 죄는 아렌델 사람들이 지었는데 숲속 사람들이 갇힌다는 설정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렌델 왕국 사람들 때문에 숲에 갇힌 노덜드라 사람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3004]

영화가 만들어진 미국은 본디 노덜드라 사람들처럼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인디언의 땅이었다. 거기에 들어온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인디언들을 '인디언 보호구역'에 살게했다. 백인들은 '보호'라는 말을 오염시켰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땅에서 강제 이주 당한 인디언들은 보호구역 안에서 관광 기념품을 만들거나 정부가 주는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갔다. 안개에 갇힌 노덜드라 사람들처럼 그들은 갇혀있었다. 숲에 갇힌 노덜드라 사람들의 형상은 분명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디즈니는 아렌델의 왕이 사과 한마디 없이 우정의 동상을 제막하는 하는 것으로 영화를 끝냈다! 디즈니는 분명 갇혀 지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겨울왕국 1까지 안나는 가장 매력적인 디즈니 여성 캐릭터 중 하나였는데 안타깝다.)


예로부터 판타지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이야기고, 동상이란 정치적 예술품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정복된 도시마다 세워진 카이사르의 동상이 그러했고, 현대 대한민국에 세워지는 동상들도 그러하다. 노년의 카이사르는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신과 같이 조각되어 도시에 세워졌고, 2011년 대한민국에서는 초대 대통령과 정치 군인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조각의 형상은 그들이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숨긴다.


https://news.joins.com/article/6701352


철학자 랑시에르의 말마따나 예술에선 ‘무엇을 보여주는가’ 보다 ‘무엇을 감추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정직한 예술은 고통은 고통으로, 폭력은 폭력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케테 콜비츠는 전쟁의 시대에 신음과 울음이 담긴 그림을 그렸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본 그녀는 색채를 사용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어두운 현실은 진실되게 검게 그려져야 했다.


The_March_of_the_Weavers_in_Berlin'_by_Käthe_Kollwitz,_1897 (https://ko.wikipedia.org)


화려한 색을 정말 마법처럼 사용했던 반 고흐도 그러했다. 탄광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던 반 고흐. 그가 탄광촌에서 그린 그림엔 색이 없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자. 탄광촌 노동자의 집안은 갱도처럼 어둡고 찐 감자와 한 주전자의 차가 식사의 전부다. 그것이 반 고흐가 본 진실이었다. 화가는 마음을 다해 느끼고 진실되게 그렸다. 그런 면에서 반 고흐는 붓을 든 예술가이자 인간의 고통에 가장 깊게 공감한 종교인이었고, 현실을 증언하는 기자였다.


Vincent van Gogh, <감자를 먹는 사람들> , 1885


애들 재밌으라고 만든 영화를 뭘 그렇게 진지하게 보느냐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그런 걸 즐겁게 볼 수 없다. 영화에서 동상 제막식 장면을 보는 순간 위안부 피해자를 그리는 소녀상이 떠올랐다. 옆 자리가 비어있는 소녀상. 그 소녀의 옆자리는 우리 자리다. 폭력의 세기가 도래하면 가진 것 없고 힘없다는 이유로 유린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의 자리. 거기엔 인종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앉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자리다. 그러나 역으로 그 자리는 그런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있는 마음을 가진 고귀한 인간의 자리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 빈 의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거기 절대 앉을 수 없는 형상이 있다. 바로 일본인 병사의 형상이다. 고통을 기억해야 하는 자리에 어영부영 우정이나 사랑 따위를 넣을 수 없다. <겨울왕국 2>의 안나는 감히 그런 짓을 했다. 전쟁이 아닌 사랑을 보여주겠다고 폭력과 고통을 지웠다.


예술에서 주제보다 중요한 건 그걸 다루는 방식이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전쟁과 환경 재양과 같은 주제도 충분히 심도 있는 판타지로 만들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라. 나우시카는 아름다운 바람계곡에 살았다. 그 옆엔 인간들의 전쟁으로 황폐해져 독기를 내뿜고 있는 숲이 있었고 거대한 곤충들이 살고 있었다. 엘사처럼 나우시카도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비밀의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그것도 자주.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엘사는 아렌델을 구하기 위해 떠나지만 나우시카는 그 폐허가 궁금해서, 그 숲을 사랑해서 떠돌아다녔다. 그 덕에 그녀는 숲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압하고 다스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사랑하여 친구가 되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것은 일회적이지 않고 꾸준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나우시카와 오무 - 인간과 동물의 연맹! [https://www.instiz.net/pt/3908526]


<나우시카>에는 전쟁 이야기도 나온다. 지구의 대부분을 황폐하게 만들고도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들. 나우시카는 전쟁을 멈추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돌진하지 않는다. 엘사와 안나에게 아렌델 사람들과 노덜드라 사람들은 그저 배경이었지만 나우시카는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은다. <나우시카>엔 환경재앙과 전쟁의 문제에 있어 주변인이 없었다. 심지어 숲 속의 곤충 오무도 전쟁을 막고 자연을 지키는 위대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엄청난 수의 오무들이 바람계곡을 향해 달려들 때 나우시카는 온몸을 던져 읍소할 수 있었다. 그러자 오무들이 진정하고 그녀를 치료했다. 애벌레같이 추한 모습의 거대 곤충에게 치유받는 인간. 나우시카의 자연은 그렇게 인간을 치유하고 용서했고 언제나 인간보다 위대했다. 한 인간의 용기와 마법으로 분노한 자연을 제압하고 환경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겨울왕국 2>의 상상은 그에 비해 얼마나 오만하고 조악한가. 그것은 마법 같은 기술로 환경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상상이다.



디즈니는 그레타 툰베리에게 배워야 한다. 지구는 한 번의 모험으로 되찾을 수 없다.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매주 금요일에 피켓을 들고, 비행기 대신 태양열 요트나 기차를 타고, SNS 등에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실천이 지구를 살린다. 해피 앤딩을 위해선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죽자고 달려드는 영웅은 필요 없다. 자기가 살아야겠다고 영웅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법이나 제대로 만들라고 외치는 수억 명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이제 미지의 세계로는 가는 건(into the unknown~) 그만하고 아는 것으로 돌아가자. 탄소배출량을 안 줄이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는 자명한 사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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