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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r 07. 2022

영광스럽지만 웃음이 없고, 비극적이지만 눈물이 없다

그리스 미술 (3) : 고전기classic

영광스럽지만 웃음이 없고, 비극적이지만 눈물이 없다

아테네에게 기원전 5세기는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뛰어난 비극(悲劇)이 상연되었으며,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광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는 계속 전쟁을 치렀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밀레토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잘 알지도 못했던 대제국을 상대해야했다. 전쟁은 간헐적으로 수십 년간 이어졌다. 밀레토스는 철저히 유린되었고, 아테네는 파괴되었다. 다행히 아테네는 역사에 남을 만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그리스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457년, 아네테를 이끌게 된 페리클레스는 문화 사업을 융성하고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했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라 불릴 만큼 도시는 성장했지만 위태로운 영예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부르는 내전이 시작되었고, 아테네는 패배했다.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https://ko.wikipedia.org


이렇게 전쟁과 전쟁이 이어지던 백년의 시간을 미술사에선 고전기라고 부른다. 그 이름에 걸맞게 그리스 예술은 한층 더 발전했고 미술사의 전범을 만들었다. 인체를 표현하는 데 있어 기술적인 제약이 사라진 듯 보였다. 조각상의 자세는 다채로워졌고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반면 표정은 고요해졌다. 이 시대 작품들은 영광스럽지만 웃음이 없고, 비극적이지만 눈물이 없었다. 자신들의 힘겨운 역사를 애도하듯 조각상들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미론, <원반 던지는 사람Discobolus>, 기원전 450년경,로마 시대 복제본, 높이 155cm, 국립 로마 박물관 https://in.pinterhttps.com

고전기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를 표현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시대 복제품으로 남아있는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Discobolos>은 그리스 장인들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순간을 포착하는 데 탁월했는지 보여준다. 동작의 생생함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 조각상을 모델삼아 원반던지기 자세를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조각상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고안된 예술작품이었다.


사실 이 작품이 실제 경기자를 포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조각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몸과 달리 조각상의 표정은 고요하다. 그는 운동의 힘겨움도 잊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도 초연한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처럼 역동적인 신체와 흔들림 없는 정신은 전시의 군인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청동상 B>는 아마도 장군이었을 것이다. 민주정이 시작된 아테네에서는 장군들의 조각을 만들 때 머리에 투구를 뒤로 젖혀 쓴 모습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떤 연구자는 이 청동상이 마라톤 전투를 이끈 밀티아데스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청동상의 모델이 누구든, 다부진 근육과 덥수룩한 수염, 여유 있는 자세는 이 인물이 노련한 전사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붉게 도금된 그의 입술은 고요하지만, 오른쪽에 남아있는 눈동자와 잘 훈련된 몸은 그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말해주고 있다.

<청동상 B>, 로마의 리아체Riace에서 출토, 페이디아스의 작품으로 추정

이 청동상은 이집트 조각부터 고집스럽게 지켜온 좌우 균형을 깨고 오른 다리로 중심을 이동한 덕분에, 쿠로스에 비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이렇게 몸의 무게를 한쪽 발에 실어 어깨와 골반이 기울어진 방향이 서로 다른 자세를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라고 한다. 이런 자세를 구현하는 것은 조각가에게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인간의 몸은 긴장되고 이완된 정도에 따라 근육의 길이와 두께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청동상만 보더라도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보인다. 아마 팔 길이도 각기 다를 것이다. 법칙을 적용해서 표현할 수 없는 이런 미묘한 차이는 고전기 조각품들을 더욱 우아하고 생명력 있게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 역사와 신화의 융합과거와 현재, 역사와 신화의 융합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한 조각가들 역시 콘트라포스토를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들이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은 없었다. 기술을 완비한 예술가들의 다음 과제는 주제 선택이었다.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고 파르테논 신전을 짓기까지 논란이 참 많았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그리스의 패자로 떠올랐지만 도시는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리스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쓰라림을 기억하려 했다. 폐허가 된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런데 ‘패배한’ 페르시아가 페르세폴리스라는 새로운 도시에 거대한 연회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연회장에는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지어 선 사절단의 모습도 새겨져있었다. 그리스에 패배했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경쟁적인 아테네 사람들은 참을 수 없었다. 그에 비견될만한 멋진 도시를 건설해야했다.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세계의 보호를 명분으로 모아둔 델로스 동맹기금을 아크로폴리스 재건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말이 동맹기금이지 약탈과 갈취로 모은 돈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아크로폴리스는 파괴되기 전보다 훨씬 거대하고 화려하게 재건되었고 가장 높은 곳에 파르테논 신전이 우뚝 세워졌다. 이제 조각으로 페르시아의 만행과 그리스의 영광을 새겨 넣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단 한명의 페르시아인도 조각으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주제는 신화였다.  


(좌) <신전 부분 명칭>, (우)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의 전투>, 파르테논 남쪽 메토프 26, 기원전 447–433년 https://commons.wikimedia.org


신전의 메토프를 장식한 주제는 켄타우로스와 리피타이족의 싸움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결혼식에 초대된 켄타우로스족은 신부와 여인들을 납치하려했다. 왜 하필 이런 신화였을까? 이유는 분명했다. 결혼식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켄타우로스는 말을 타고 나타나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인을 상징했다. 늙고 추한 얼굴을 하고 짐승처럼 달려드는 반인반수의 괴물은 그리스인이 생각하기에 야만적인 적을 나타내기에 딱 알맞은 형상이었다.


<파르테논 신전 남쪽 프리즈>, 종교 예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와 더불어 파르테논 신전의 남쪽 프리즈에는 종교의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조각되어있다. 분명하진 않지만, 이것이 신화에 나오는 에레크테우스 왕이 희생제의를 준비하는 장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테네를 세운 에레크테우스 왕은 트라키아 군대의 위협을 받을 때, 그의 딸 중에 한명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을 받게 된다. 딸들은 서로 제물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제물이 바쳐졌고 예언대로 왕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말을 탄 사람들>, 파르테논 신전 북쪽 프리즈, 기원전 440년, 대리석, 높이 106cm, 대영박물관 https://en.wikipedia.org

이런 해석을 따르면 프리즈의 북쪽에는 새겨진 기마행렬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집결된 왕의 군대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기마대에 나타난 인물이 192명이라는 것이다. 이 숫자는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마라톤 전투의 전사자 숫자와 같다. 아테네의 조각가들이 마라톤 전쟁의 용사들을 염두에 두고 프리즈의 내용을 고안한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리얼하게 표현된 전쟁의 참상을 보며 비탄과 분노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과거와 현재, 역사와 신화를 융합했다. 역사가 신화와 만나는 순간, 사건을 객관화 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게 되었고, 역사적 사건은 보편적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인가 고전기 조각들은 어떤 장면에 있든 격정에 휩싸이지 않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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