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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r 09. 2022

확장된 세계의 공감 키워드, 고통

그리스 미술 (4) : 헬레니즘Hellenism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왕정, 귀족정, 민주정 등 제각기 다른 정치체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신을 모시고 같은 언어를 쓴다는 공통점 외에 그리스 세계를 하나로 묶을 요인은 없었다. 그랬던 그리스 세계의 ‘통일’은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반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필리포스 2세에겐 특별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스무 살에 왕위에 올라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인도에까지 도달한 인물,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그의 원정은 그리스 세계와 아시아가 만나는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이 위대한 왕은 미술가들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며 새로 정복한 땅에 자신의 초상조각을 세우고 기념 건물을 건축했고, 때론 이방인의 옷을 입고 행군을 했다. 그 여정을 따라 그리스 문화가 동쪽으로 전파되었고, 동방의 문화도 그리스로 흘러들었다.


이렇게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양식, 그리스 본토를 떠나 좀 더 국제적으로 변한 그리스 미술을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부른다. 시기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서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약 300년의 시간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분명 알렉산드로스다.       




알렉산드로스, “인생은 연극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태몽은 아주 특별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배에 벼락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사자 모양의 직인으로 아내의 배를 봉인하는 꿈을 꾸었다. 제우스의 상징인 번개로 잉태되어, 사자와 같은 기상을 타고난 아이가 바로 알렉산드로스였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거대한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현신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역할과 어울렸다. 그는 눈에 잘 띄는 커다란 흰 깃털을 투구에 꽂고 가장 먼저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승리를 기다리는 왕이 아니라 무공을 세우는 전사로서 전투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연출가로서 어떻게 해야 자신이 신의 아들처럼 보일지 알고 있었고, 미술가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을 엄중히 관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뤼십포스Lysippos만이 자신의 모습을 조각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 이를테면 고개를 다소 왼쪽으로 기울인 듯한 자세와 정감이 넘치는 듯한 눈빛 등을 뤼십포스가 정확히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이전에도 그리스에는 영웅적인 개인의 초상을 만드는 문화가 있었다. 올림피아의 우승자나 위대한 정치가의 초상이 종종 조각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정은 개인의 자기 선전을 견제했기 때문에, 대개의 조각은 사후에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외양을 닮게 묘사하는 것을 경계했다. 시인과 철학자, 장군과 정치가 등 각 유형을 대표하는 표준적인 형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초상 조각은 그를 이상화 시키면서도 그의 개성을 담아냈다.


(좌) 그림 1 헤라클레스 모습을 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원전 330년경, 높이 24cm / (우)그림 2 <필리포스 2세의 두상>,  기원전 350~325, 높이 3.2cm

헤라클레스처럼 사자 가죽을 쓴 알렉산드로스의 두상(그림 1)은 이 위대한 정복자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연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알렉산드로스를 꽤나 닮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에서 발견된 작은 조각 때문이다.


발굴된 무덤 안에는 호화로운 부장품들과 함께 필리포스 2세의 상아 초상(그림 2)과 두개골 파편들이 있었다. 법의학자들은 그 파편을 통해 무덤 주인의 얼굴을 재구성했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상아조각과 유사했고, 필리포스가 한쪽 눈에 창상을 입어 실명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알렉산드로스의 조각 역시 그의 실물과 꽤 닮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모습을 적절한 미화 작업 후에 세계에 퍼뜨린 최초의 인물이라 할만하다.




라오콘, 그의 고통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고 나서 그가 이룩한 대제국은 빠른 속도로 분열되었다. 나라는 조각났지만 그의 후임자들도 미술을 이용해 선전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집트 지역을 점령한 프톨레마이오스는 파라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 같은 모습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묘사했고, 마케도니아 지역을 통치한 디미트리오스는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포세이돈처럼 삼지창을 든 모습을 동전에 새겨 넣었다. 또 페르가몬을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한 아탈로스 1세는 자신의 이미지를 알렉산드로스처럼 연출했다.(그림 3, 4)


(좌) 그림3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의 초상>, 기원전 240~200년/ (우) 그림4  <젊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두상>(복제본), 기원전 340~330년


조각은 왕의 모습뿐만 아니라 제국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였다. 예를 들어 아탈로스 1세는 갈리아 족의 침입을 막아낸 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었다. 그중 한 작품은 아내가 잡혀서 겁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내를 죽인 뒤 자결을 하는 갈리아 전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그림 5)


그림5 <아내를 죽이고 자결하는 갈리아 전사>, 후대의 복제본으로 추정, 기원전 220년경, 대리석, 높이 211cm, 로마, 로마 국립미술관


조각가는 적의 최후를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극적인 장면을 선택했다. 갈리아 전사는 한 손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있다. 수직으로 세워진 칼은 이제 막 살갗을 뚫고 들어가고 피가 흐른다. 이처럼 자극적인 소재는 장면의 긴장감을 높였고, 리얼한 묘사는 매우 감각적이었다.


신화의 한 장면을 주제로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그림6)에도 이 같은 특징이 잘 나타난다. 트로이의 사제였던 라오콘은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놓은 목마를 성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신들은 이미 트로이의 멸망과 그리스의 승리를 결정해 두었기에 라오콘을 벌하려고 거대한 두 마리의 뱀을 보냈다. 뱀들은 먼저 그의 두 아들의 작은 몸통을 휘감고 나서 아들을 구하러 온 라오콘을 붙잡았다. <라오콘 군상>은 신화가 묘사하고 있는 라오콘의 최후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림6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원작의 대리석 복제본, 기원전 150년경, 높이 184cm, 로마, 바티칸 미술관


이 조각은 신상도 아니고 신을 위해 봉헌된 것도 아니었다. 조각이 갖고 있던 주술적·종교적 쓰임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실을 외친 정의로운 인물의 부당한 죽음이나 신들의 결정에 대한 의문은 사라졌다. 조각가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며 관람자의 눈을 자극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할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헬레니즘 미술은 고전기 예술이 갖고 있던 조화와 당당함을 잃었다. 라오콘의 얼굴과 몸통, 팔과 다리는 제각기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온 몸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 헬레니즘 조각의 탄생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으로 자율적이었던 그리스인들은 옛 질서의 붕괴와 대제국의 성립과 분열을 목도했다. 고전기 예술의 특징인 평온한 표정과 절제된 신체 표현은 이들이 느꼈던 당혹과 불안을 담아낼 수 없었고, 여러 언어와 문화가 교차되는 거대한 사회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라오콘 군상> (부분)

조각가들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게 감각에 호소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들은 명료함과 균형감을 상실했지만 시대를 건너뛰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오콘의 고통에 찬 얼굴은 로마인들에겐 국가를 지키는 영웅의 상징으로 경탄받았고, 기독교 미술에선 예수의 얼굴로 변용되었다. 18세기 독일 미학자 빙켈만은 라오콘을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본받아야 할 고귀한 영혼의 표상으로 해석했다.


 “그의 고통은 우리들의 영혼에까지 스며 들어온다. 우리들은 이 위대한 사람처럼 그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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