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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r 11. 2022

에트루리아와 그리스, 로마미술의 두 가지 기원

로마 미술 (1) 로마식 사실주의

로마의 시작점엔 두 신神이 있었다. 미美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가 바로 그들이다.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의 아들 아이네이아스는 멸망한 트로이의 유민을 데리고 로마 인근에 정착했다. 그 후손인 레아 실비아는 전쟁의 신 마르스를 만나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게 된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강에 버려졌으나 마르스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한 언덕에 이르렀다. 때마침 암늑대가 나타나 젖을 먹이며 보호해 주었고, 나중에 우연히 목동에게 발견되어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자라게 된다. 장성한 형제는 늑대가 자신을 키워준 언덕에 도시를 세우고 통치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승자는 로물루스였다. 로물루스는 형제인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를 건국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비너스와 마르스는 도시의 선조와 연결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비너스는 도시를 지키기엔 무력한 신이다. 이 여신은 파리스에게 유부녀인 헬레나를 소개시켜 트로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놓고 전투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마르스 역시 존경할만한 신이 못된다. 전쟁의 신 아테네와는 달리, 마르스는 계획도 절제도 없이 불화와 살육을 조장하여 신들의 빈축을 산다. 그런데 이 두 신의 이미지는 로마와 참 잘 어울린다. 로마는 사랑에 빠진 비너스처럼 열정적이었고, 전쟁의 신 마르스처럼 파괴적이었다. 형제를 죽이고 로마를 건설했다는 신화는 도시 국가 로마의 성립 과정에 많은 갈등과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반면 남겨진 유물들은 이 도시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다른 문화를 수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에트루리아: 세계 문화를 받아들인 로마의 이웃


<카피톨리누스의 늑대상>[그림1]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돌보았다는 늑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조각상이 원래부터 그 전설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늑대 아래에서 젖을 빨고 있는 두 아기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아기들과 늑대를 표현한 기법이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림1 <카피톨리누스의 늑대capitoline wolf>, 기원전 500년경, 청동, 높이 85cm, 카피톨리노 박물관, 로마 //en.wikipedia.org


아기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반면, 늑대는 해부학적 구조를 세심하게 표현한 갈비뼈와 매우 장식적인 세부를 함께 지니고 있다. 늑대의 벌어진 입과 날카로운 이빨, 긴장된 자세 등은 늑대가 지닌 야생성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목과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털은 매우 양식화(자연적인 형태를 단순화하고 관습화하여 장식적으로 만듦)되어있다. 이런 표현법은 로마가 아니라 에트루리아의 것이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 북부 지역에 위치한 12개 도시 국가의 연방체로 초기 로마를 정치적으로 지배했다. 기원전 6세기말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하지만 로마는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들처럼 에트루리아인들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를 흡수하게 된다.


에트루리아는 페니키아, 아시리아와 근동 지역의 문화를 의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리스와도 교류하며 최초의 ‘글로벌 미술’을 탄생시켰다. 당시 유럽인들에겐 지중해가 세계의 전부였으니 그들의 미술을 ‘세계주의적 형태’라고 부르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베이의 아폴론 상>[그림2]은 에트루리아 인들이 그리스 문명을 어떻게 소화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좌) 그림2 <베이의 아폴론상>, 에트루리아, 기원전 500년경, 채색 테라코타, 높이 180cm / / (우) <쿠로스 상>,그리스, 기원전 525년경, 높이 193cm


이 조각상은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베이veii에 있었던 신전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다. 에트루리아 방식으로 지어진 베이 신전은 흔적만 남아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석재를 이용한 데 반해서 에트루리아 인들은 목재와 흙벽돌과 테라코타를 신전 건축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베이의 아폴론 상> 역시 테라코타로 만들어졌다.


아폴론상은 오른발을 크게 앞으로 내딛으며 팔을 내밀고 있다. 소용돌이 장식이 있는 버팀목이 아폴론의 다리 사이에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명랑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된 아폴론상은 그리스의 <쿠로스 상>(그림3)에서 주요한 착상을 빌어 왔다. 하지만 에트루리아인들은 한결 역동적인 조각을 만들었다. 아폴론은 쿠로스와 달리 옷을 입고 있는데,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옷감의 주름은 생동감을 더한다. 로마의 아폴론은 자신의 미를 뽐내려 하기 보다 멋진 옷을 차려입고 다른 문화를 맞이하러 경쾌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 조각가가 빚어낸 로마의 얼굴


고대 로마는 그리스 문명의 살해자이자 계승자였다. 기원전 7세기경,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에 건설된 그리스 식민지는 에트루리아와 더불어 로마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했다. 작은 도시에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국가로 성장한 로마는 기원전 2세기 중반 코린토스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면서 그리스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 유물이 파괴 되고, 청동 조각들은 병사들에게 지급할 동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그리스 예술품들이 복제되었고 로마 스타일로 재탄생 되었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 문명의 가치를 알아본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유럽 곳곳으로 그리스 문명을 전파한 사절단이었다.

<두 개의 초상 두상을 들고 있는 귀족 남자>, 로마 미술, 서기 1세기, 대리석, 높이 165cm  https://artsandculture.google.com

서기 1세기경에 만들어진 <두 개의 초상 두상을 들고 있는 귀족 남자>[그림4]는 높은 수준의 대리석 조각 기술을 보여준다. 이는 분명 그리스인의 솜씨이다. 헌데 이 조각에 반영된 정서는 로마인의 것이다.


우리가 관을 운구할 때 앞서가는 사람이 영정 사진을 들 듯, 로마인들은 죽은 조상의 실제 모습과 닮은 두상을 들고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체격과 외모에 있어서 죽은 이와 가장 닮은 사람이 두상을 들고 행진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죽은 이를 경배하는 공공의 희생제에도 초상 조각을 전시했다.


초상 조각은 최대한 실제 인물과 닮게 만들어서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는 없었던 사실주의가 자리 잡게 된다. 조각가들은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골격은 물론 사마귀나 잔주름까지도 빠지지 않고 묘사했는데, 이렇게 과장된 사실주의를 ‘베리즘verism’이라 부른다.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조상들과 도시의 정치인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제정 로마 시대에 이르면 심지어 죽은 왕을 신으로 만들어 숭배하기까지 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경배하는 로마인의 문화는 유교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에겐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이어져온 조상숭배를 연상케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고된 노동으로 황하黃河를 다스리고 대지를 경작하여 문명을 이루었다. 조상 숭배는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준 조상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조상과 자신과 조상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고, 조상의 영혼에게 부탁하여 우주를 주관하는 예측 불가능한 신을 통제하고자 했을 것이다.


조상들이 전쟁으로 확보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로마인들은 고대 중국인들처럼 자신들의 운명이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제우스)는 변덕스러운 신이었고, 로마는 늘 전쟁 중이었다. 로마인들 역시 신의 마음을 달래고 도시의 안녕을 기원할 보다 가까운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매우 사실적인 초상조각은 강대하지만 불안한 로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조상을 떠올리며 마음의 평안을 얻는 의지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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