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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r 14. 2022

“황제는 늙지 않는다”, 정치 선전 미술

로마 미술 (2) 황제의 등장과 권력의 표상

기원전 10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났다. 황제를 뜻하는 단어, 카이저Kaiser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공화정의 전통을 중시하던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가 거의 왕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황제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림1 <카이사르의 초상>, 기원전 50-40년, 대리석, 높이 33cm, 안티히테 박물관, 토리노, 이탈리아 rmfl

<카이사르의 초상>[그림 1]은 조상숭배 전통에 따라 만들어졌던 여느 귀족들의 두상처럼 그의 성격과 개성을 드러낸 사실적인 조각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얇은 입술에서는 일인자의 우월감이 보이고, 툭 튀어나온 눈에서는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느껴진다.  로마의 일인자에 대한 미화는 없었다. 넓은 이마, 움푹 파인 볼과 튀어나온 광대뼈, 좌우 비대칭인 두개골 모양과 미간과 이마에 생긴 주름까지 사실적이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뺀다면 <카이사르의 초상>은 좀 지적이고 까다로운 귀족 아저씨의 얼굴일 뿐이다.


십수 년 뒤 같은 가문 출신이자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을 땐 분위기가 달라졌다. 원로원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며 프린켑스(princeps, 최고 시민)라는 직함을 헌정하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바쳤다. 실질적인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


황제의 등장은 로마 미술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말처럼 “흙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하여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물려주었다.” 그는 황제의 존엄함과 제국의 번영을 홍보하는 조각과 건축물로 도시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미술은 국가 선전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상 – 황제는 늙지 않는다


준수한 용모의 이 청년은 아우구스투스다.[그림 2] 이 대리석 조각상은 아우구스투스 사후에 만들어졌는데, 조각상은 칠순을 훨씬 넘기고 죽은 황제를 인생의 절정기에 있는 청년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국으로 새 출발을 시작한 로마는 자신의 이미지를 이렇게 포장했던 것이다. 황제의 얼굴은 넥타르를 먹고사는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늙지 않았다.


그림2 <아우구스투스 상>Augustus of Prima Porta, 서기 1세기초, 높이 2.03m, 바티칸 박물관, 로마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문학도 황제의 존엄함을 홍보하는데 일조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를 통해 로마의 시조를 비너스의 후손으로 만들었고,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의 말미에 카이사르를 끼워넣으며 결국 그를 신으로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신격화는 같은 가문 출신이자 그의 상속자인 아우구스투스의 신성을 보증하는 중요한 정치 행위였다.


<아우구스투스 상>은 황제의 신성을 나타내는 몇 가지 상징을 담고 있다. 첫 번째 상징은 황제의 맨발이다. 맨발은 땅을 걷지 않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더불어 황제의 발치에서 돌고래를 타고 있는 큐피드도 신성의 증표이다. 돌고래는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를 암시하고, 큐피드는 율리우스 가문이 비너스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조각상은 이렇게 은근히 황제의 신성을 표현했다.


상징적으로 표현된 신성과 달리 로마 군대의 위엄은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었다. 황제의 복부에 새겨진 두 인물은 로마 병사와 파르티아인이다.[그림 3] 이는 로마가 기원전 20년에 파르티아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형상이다. 파르티아인은 군기를 로마 군인에게 바치고 있는데 제구가 작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군복을 입고 어깨에 토가를 걸치고 있는 로마 군인은 키가 크고 당당하다.


그림3 <아우구스투스 상>Augustus of Prima Porta(부분), 서기 1세기초, 높이 2.03m, 바티칸 박물관, 로마


흉갑 상단 중앙에는 천신이 하늘의 지붕을 펼치며 로마 제국 전체에 평화를 퍼트리고 있고, 하단에는 과일로 가득 찬 풍요의 뿔을 들고 있는 대지의 여신이 있다. 그리고 양 어깨 아래에는 신 솔(sol)과 달의 여신 루나(luna)가, 하단 좌우에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배치되었다. 이는 온 우주가 로마 황제의 통치를 돕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놀라운 조각은 신체 표현도 포기하지 않았다. 가슴근육과 복근, 유두와 배꼽은 청동 흉갑과 하나가 되었는데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신성을 물려받는 아름다운 황제의 건장한 신체와 뛰어난 정치력, 거기에 신들의 보호까지. <아우구스투스 상>은 이 모든 메시지를 하나의 조각으로 조합한 탁월한 정치 홍보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를 본떠서 만든 지배자의 원형


그림4 <도리포스-창을 든 남자>, 기원전 440년경 폴리클레이토스의 작품을 모사한 로마 시대 복제품, 대리석, 높이 198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미국, 미네소타

황제의 의뢰를 받은 조각가들은 지금의 광고 제작자처럼 주문자와 대중의 취향을 모두 고려해야 했다. 당시 로마가 열광하고 있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것이었다. 황제의 조각을 만든 제작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도리포스-창을 든 남자>[그림4]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작품을 모사한 조각이다. 나란히 놓고 보면 <아우구스투스 상>[그림2]은 이 조각과 상당히 유사하다. 머리 모양과 얼굴 생김새, 약간 오른쪽으로 돌아간 고개와 오른발에 무게를 싣고 왼 다리를 살짝 뒤로한 자세까지 똑같다. 두 조각은 모두 왼손에 창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앞으로 뻗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그것이다. 이로 인해 조각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면서 <아우구스투스 상>은 우아하고 건장한 운동선수가 아닌 통치자의 면모를 지니게 된다.      


"그리스 조각가가 공간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을 표현한 반면에 로마의 조각상은 뒤로는 벽을 등지고 앞에 펼쳐진 공간을 지배한다."(낸시 H. 래미지, 앤드류 래미지, <로마미술>)

 

그림 5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조각상>, 서기 160~169년, 대리석, 바티칸 박물관, 로마

후대의 황제들은 이를 많이 모방했다. 기원전 440년경에 만들어진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조각상>[그림 5]은 왼손으로 승리의 여신상을 들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우구스투스 상>과 포즈가 거의 유사하다. 조각가는 구불구불한 수염 등으로 황제의 개성을 나타내면서 오른손을 들고 있는 포즈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데 그렇게 멋진 자세를 취한 황제가 나체라는 것이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 매우 어색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황제의 공식 초상이었다. 다만 설치되는 지역이 제한적이었다. 황제의 누드상은 로마가 정복한 그리스 지역에 놓일 선전물이었다. 신과 운동선수를 나체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었던 그리스에서는 나체로 표현된 조각이 가장 영웅적인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조각상의 지역 맞춤형 정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팔을 들고 있는 황제의 조각상을 모방하는 것은 로마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처럼 군림했던 많은 정치인들의 동상이 이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팔의 각도, 손의 모양 등에 따라 조각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럼에도 앞을 향해 뻗고 있는 오른팔은 그들이 지배자라는 것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로마 미술은 그렇게 정치 미술의 전형이 되었고 현대의 정치 이미지는 여전히 로마조각에서 영감을 얻는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고, 역사는 덧없이 흘러가지만 권력의 표상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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