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미술 (3) 제국의 영광과 해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는 분명 사실이었다. 로마 군인들은 언덕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군용 도로를 만들었고 그 길을 따라 군대와 물자, 왕의 명령과 식민지의 소식이 이동했다. 도로는 거대한 제국의 핏줄이자 신경망이었고, 도시 로마는 제국의 심장이었다.
도로를 따라 가장 빠르게 제국의 심장부로 들어오는 것은 전쟁 뉴스였다. 승전보가 로마로 전해지면 원로원은 이번 승리가 개선식을 할 만큼 영예로운 것인지를 투표를 통해 결정했다. 개선식이 열리면 승전한 군대는 무기 대신 온갖 전리품들을 들고서 도시를 행진했다.
승리를 기념하는 것은 개선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광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했다. 로마인들은 그 방법으로 개선문과 기념주를 선택했다. 이 둘은 목적은 같았으나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이 달랐다. 개선문의 부조는 뒤늦게 뿌려지는 호외처럼 사건의 하이라이트를 압축적으로 제시했다. 반면에 기념주는 특별 연재 기사처럼 군인들의 일상과 특별했던 전투를 순차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티투스 개선문 : 이스라엘을 진압하고 로마를 얻은 황제의 기념비
티투스 개선문[도판 1]은 한 개의 아치를 가진 비교적 작은 홍예문으로 개선문의 기본 형식을 잘 보여준다. 스팬드럴(spandrel-아치 위 모서리 부분)[그림 2]에는 날아오르는 승리의 여신을 두고 그 상단에는 개선문 건축과 관련된 정보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아치 안쪽에는 양 옆으로 개선행렬 장면을 나타내는 부조를 배치했다.
그중 <티투스 황제의 개선식>[도판 3]에서는 사두마차를 탄 황제와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승리의 여신을 볼 수 있다. 앞서가는 수행원들의 머리 위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긴 장대 모양의 파스케스가 저부조로 흐릿하게 묘사되었다. 이런 표현은 멀리 있는 대상을 흐리게 묘사하여 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대기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낸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여백은 황제의 모습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맞은편 부조[그림 4]에는 여러 사람들이 전리품들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한데 이 부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이 없다. 시선을 끄는 것은 화면 중앙에 놓인 메노라(menorah, 촛대)이다. 7개의 가지가 달린 메노라는 유대인들의 예배에 쓰이는 성물로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조각가는 여기서도 인물들 머리 위로 열린 공간을 만들어 메노라를 돋보이게 만듦으로써 로마가 정복한 곳이 어디인지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곳은 예루살렘이었다.
이 개선문의 주인공 티투스(재위 79~81년)는 가장 끈질기게 반란이 이어졌던 팔레스티나 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는 수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예수살렘에 있는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며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고, 나중에 황제까지 오르게 된다. 그것은 로마인들에겐 기록할만한 승리였지만 유대인들에겐 암울한 역사일 것이다. 하지만 승자의 기념물인 개선문에는 전쟁의 어두운 면은 보이지 않는다.
트리야누스 기념주 : 다뉴브강 너머에서 보내온 군대의 전장 보고서
트리야누스 기념주[그림 5]가 승전을 기념하는 방식은 개선문과 달랐다. 38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기둥은 부조가 새겨진 원통형 대리석을 쌓아 올려 만든 것이다. 기둥에 나선형으로 새겨진 부조는 트리야누스 황제(재위 98~117년)가 다키아(루마니아) 지역을 평정한 전쟁을 두루마리 그림처럼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배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고, 행군을 하고, 막사를 짓고, 전투를 하는 로마 군대의 하루하루가 꽤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림 6] 덕분에 우리는 당시 군인들의 군복과 무기는 물론 주둔지의 풍경과 막사, 냄비와 컵에 이르는 주방 용품까지 확인할 수 있다.
조각가가 특히 주의 깊게 배치한 장면은 황제 트리야누스의 공식 일정들이다. [그림 7] 트리야누스는 이 부조에 무려 59번이나 등장한다. 황제는 희생물을 봉헌하고, 원정대를 출발시키고, 군대를 향해 연설한다. 이런 장면들에서 황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가장 전면에 배치되었고, 항장 다른 군인들보다 더 크고 돋보이게 묘사되었다.
게다가 이 부조엔 적의 최후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림 8]은 로마 기병대의 공격에 밀려 나무에 기대어 앉은 다키아족의 대장 데케발루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거대한 적을 향해 포기를 모르고 저항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로마인들은 적이었음에도 영웅적인 그의 모습에 감동했고 존경을 표했다. 이 부조는 최후의 순간에 나무 아래에서 칼을 들고 자결을 감행하는 데케발루스를 비장하게 그리고 있다.
로마인들은 식민지를 포기할 순 없었지만 최소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트리야누스는 옵티무스 프린켑스(optimus princaps-최상의 원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치와 국방 모두에 탁월한 황제였고, 전성기에 다다른 로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트리야누스 황제의 동상은 이 거대한 기념주의 맨 꼭대기에 세워져 로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대한 황제와 무적의 군대는 로마를 영원히 지켜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로마도 영원하지 않았다. 제국은 분열되었고 중세中世가 열렸다. 트리야누스 상은 지상으로 내려왔고 기념주의 꼭대기엔 그리스도교 초대 주교인 베드로 상이 올라섰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거상 : 신을 우러른 황제의 조각난 초상
기독교의 시대를 예고 한 사람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7~337년)였다. 그는 무너져가는 로마를 정비하고 수도를 아시아와 유럽의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새로운 수도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로마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대제(大帝)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까지 흡수해 버린 로마 황제의 조각은 매우 거대해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시내에 바실리카를 짓고 자신의 좌상을 두었는데 그 높이가 9m가 넘었다. 황제의 거상은 엄격하고 초연한 표정으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뿜어내며 손가락으로 신의 영역인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림 9] 지금은 그 잔해만 남아있지만 큰 눈과 깊이 파인 눈동자만으로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림 10]
지중해를 집어삼켰던 거대한 제국은 이 황제의 석상처럼 기독교 신을 우러르며 서서히 조각이 났다. 찬란했던 영웅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신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