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카타콤바의 이콘
중세(中世, Meddl age)라는 말은 많은 편견이 담긴 말이다. 이 단어는 쉽게 말해 영광스러운 고대 로마와 찬란한 르네상스 사이에 "끼인 시대'라는 뜻이다. 중세는 이렇게 어정쩡한 이름도 모자라 '암흑기'라는 별명까지 달고 있다. 종교가 중심이 되어 인간의 삶이 어두워졌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중세는 암흑기라 부르기엔 매우 찬란한 도약의 시기였고, 끼어있다고 부르기엔 매우 폭넓은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는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평화와 권위를 획득한 교회는 그에 어울리는 행정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한편 로마 제국은 395년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양분되는데, 그중 서로마는 476년에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은 1453년까지 지속된다. 서로마의 몰락부터 비잔틴 제국의 몰락까지 약 1000년의 시간을 중세라고 부른다.
중세는 기독교의 시대였다. 중세 미술도 당연히 교회 건축과 장식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기독교 미술은 교회가 아니라 카타콤바catacomba(그림1)에서 시작되었다. 카타콤바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지하 공동묘지로 사자(死者)들의 안식처이자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기독교 미술은 왜 하필 무덤 속에서 출발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형태는 어떠했을까?
무덤에 새겨진 부활 신앙
카타콤바는 어둡고 서늘한 지하 세계로 현세와는 완전히 분리된 느낌을 준다. 빛과 어둠을 가르는 카타콤바의 문을 열면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그 아래로 한두 사람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복도가 이어져있다. 길게 이어진 복도 벽면에는 긴 사각형 모양의 홈이 곳곳에 파여져 있는데 이 홈이 헝겊으로 싼 시신을 안치했던 공간이다. 현재 유골은 모두 치워졌지만, 수백구의 시신이 놓여있었던 좁은 길을 지나는 것은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벽에 파인 홈 중에 유달리 작은 것은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한데 죽음은 그렇게 무작위로 찾아올지 몰라도 죽은 이후의 삶은 평등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가족들을 위해 특별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방, 일정한 규격으로 파인 벽감, 그림으로 장식된 벽면과 천정까지. 꽤 근사한 지하 공간이 부유층을 위해 마련되었다. 죽은 자들의 공간 역시 산 사람들의 세계처럼 공평하지 않았다.
지하 세계엔 유족들이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는 넓은 홀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기독교인들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지하 묘소로 들어갔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예식을 올린 뒤 지상으로 올라왔다.
초기 기독교 미술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비둘기, 어린 양, 촛대 등 너무나 소박한 그림들이었다. 얼핏 봐도 아마추어의 작품이 확실한 그림들은 울퉁불퉁하고 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타콤바의 그림들은 무덤에서 죽은 자들의 구원과 부활을 기원하는 기도문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죽음의 문제엔 별 관심이 없었다. 현생의 죄와 벌에 따라 천국행과 지옥행이 결정된다는 관념도 없었다. 죽음은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죽음 이후를 상상했고, 부활 신앙은 적절한 해답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기도를 올렸고, 그 마음을 벽에 새겼다. 나뭇잎을 물고 있는 새[그림 2]는 대홍수 때 노아에게 올리브 잎 물고 온 비둘기로, 구원과 성령의 표상이었다. 어린 양은 고통을 짊어진 희생양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메노라(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촛대)[그림 3]는 하느님의 등불이자 신의 눈을 의미했다.
솔직하고 소박하게 표현된 인물상들은 젊고 우아하며 늠름한 모습이다. 이런 형상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양을 어깨에 걸머진 착한 목자[그림 4]는 로마의 옷이 아닌 그리스의 옷을 입고 온화하고 밝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부활신앙은 구원의 메시지였기에 장례적인 성격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무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 신앙은 그렇게 무덤에서 싹트고 있었다.
이콘, 그림으로 전하는 메시지
카타콤바에 그려진 것과 같은 도상을 미술사에서는 이콘(iconography)이라 부른다. 아이콘(icon)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클릭하면 그것과 연결된 프로그램이 시작되듯, 미술의 이콘은 무엇인가를 표시하고 대리하는 표증이다. 특히 종교적 이콘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카타콤바의 도상 중에 우리 눈에 조금 낯선 것은 닻이다.[그림 5] 닻은 바다를 떠돌던 배가 안전하게 항구에 정박했다는 의미로 신이 인간을 구원하여 천국에 이르게 해줄 것이라는 소망의 표현이다. 상징이란 이렇듯 상징체계를 모르면 그 맥락을 읽기 어렵다. 물고기 도상도 그중 하나다.
물고기는 흔히 빵 다섯 개와 함께 그려지면, 어린아이가 사심 없이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이 일어났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가난과 배고픔을 일상처럼 경험하는 이들에게 그보다 더 자극적인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물고기 도상은 그렇게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고 풍요를 약속했다.
헌대 이와 달리 무덤에 그려진 물고기 도상은 빵 없이 홀로 그려졌다.[그림 6] 물고기란 뜻의 그리스어 ‘Ichthys’와 함께 그려진 것이 많았다. 때론 ‘Ichthys’라는 글자를 가지고 물고기를 표현하기도 했다. Ichthys는 “예수, 그리스도, 신의 아들, 구원자(Ίησοῦς Χριστός, Θεοῦ Υἱός, Σωτήρ)”의 첫머리를 따온 말이었다.
수많은 줄임말이 만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신앙 고백을 대신하여 “물고기”를 새기는 건 왠지 코믹해 보인다. 그러나 박해받던 시절 기독교인들에게는 미적인 표현이 아니라 간결하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도상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었다. 물고기는 신앙인들끼리 주고받는 암호였고, 때론 죽음을 감내할 수 있게 하는 구원의 증표였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평등하게 대했다.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도들은 로마 황제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병역도 거부했다. 신앙인들의 은밀한 모임은 반란을 획책한다는 누명을 불러왔다. 탄압과 박해가 이어졌다. 순교자의 피가 수없이 흘렀고 그 사이 로마도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공인된 종교가 된 기독교는 무덤 밖으로 나와 활기차게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기독교 미술은 성당을 장식하는 장엄한 모자이크로 발전했다. 물고기 형상과 같은 단순한 도상은 거대한 성당을 장식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성서에 나오는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의 소재로 선택되었다.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역으로 교회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 조직은 로마의 행정조직처럼 위계가 생겼고, 신자들과 성직자 간의 구별 또한 엄격해졌다.
시신 옆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며 비둘기를 새기는 소박하고 평등한 신앙 공동체는 사라졌다. 카타콤바에 남아있는 서툰 그림들은 순박했던 신앙 공동체가 남긴 아름다운 신앙의 증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