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로마네스크 양식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종교 미술은 비약적으로 발달했고 6,7세기엔 (聖像성상) 숭배가 극에 달하게 된다. 이콘 숭배는 거의 생활이 되었고, 신자들은 성상을 휴대용 부적처럼 들고 다니며 세속적 축복의 도구로 이용했다. 신자들은 이처럼 성상을 좋아했지만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성상을 두고 찬반 논쟁을 벌여왔다. 성상은 신의 형상인가 우상인가? 성상 숭배가 올바른 신앙인가? 성상의 제작을 용인할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 이런 논쟁은 시각적인 조형물이 인간의 정신을 현혹시키는 위험한 것인지, 아니면 신을 향해 나아가게 도와주는 이로운 것인지에 관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동로마의 황제 레온 3세(재위 717-741)는 성상 반대파였다.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남겨두고 모든 성상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성상과 성화들이 파괴되었고 심지어 성상을 숭배하는 신자들과 성상 제작을 도맡아 오던 수도사들에 대한 박해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탄압엔 세금,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던 수도원을 견제하는 황제의 정치적인 목적도 숨어있었다. 그럼에도 길고 긴 논쟁 끝에 성상이 전교에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여졌고, 교회는 공식적으로 성상 공경을 승인하게 된다.(843년)
성상 논쟁에서 승리를 거둔 수도원은 10-12세기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전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은 수도원을 위한 건축양식이었다. 수도원 성당은 다양한 돌조각으로 장식되었는데 그 조각 중에는 성상뿐만 아니라 온갖 동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형상들이 이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신비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육중한 건축물과 엄숙한 조각
로마네스크는 로마 스타일이란 뜻으로, 로마 시대 정치 공간이었던 바실리카와 비잔틴 양식의 돔이 합쳐진 건축 양식이다. 성당의 외관은 십자가 형태로 지어졌는데, 신랑과 익랑이 교차되는 부분에 높은 탑 세워졌다.[그림 1]
이와 더불어 화재로부터 성당을 보호하기 위해 석재로 지붕을 얹었는데 이를 위해 도입된 방법이 고대 로마의 발명품인 아치였다. 긴 열주를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아치는 단조로운 공간 안에 리듬감과 질서를 부여했다.[그림 2] 그런데 돌로 된 무거운 아치를 버텨 내려면 든든한 벽과 기둥이 필요했기에 기둥과 벽이 두꺼워졌고 창문도 작아졌다.[그림 3] 자연히 실내는 어두웠고,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단조롭게 만들어졌다.
멀리서 보면 로마네스크 성당은 거대한 돌덩이처럼 육중하고 견고해 보인다. 어떤 적이 와도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건축물은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신자들을 지켜줄 거대한 성채城砦 같다. 실제로 몇몇 로마네스크 성당들은 요새처럼 쓰이기도 했다. 속세와 떨어진 곳에 세워진 수도원 건물은 교회의 보물들과 성인의 유골, 귀한 책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민족이 침입할 때면 때때로 약탈자들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렇듯 로마네스크 성당은 매우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구조의 건축물이었었다.
성화상 논쟁이 종식되고 북방의 이민족들에게도 기독교가 전파되자 수도원은 번영의 길로 들어선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성지 순례를 권했고, 성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에 많은 수도원들 건립되었다. 프랑스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목에 놓인 무와삭 수도원(Moissac 115년~20년경)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쉴 곳을 찾아 성당에 도착한 순례객들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와삭 수도원 성당 정문 팀파늄(tympanum)에는 매우 위압적인 분위기의 <묵시록>이 새겨져있다.[그림 4] 중앙에는 수염을 기른 중년의 예수가 앉아있고, 4복음서를 상징하는 독수리(요한), 소(루가), 사자(마르코), 인간(마태오)이 모두 날개를 달고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형상의 천사들을 경계로 24명의 장로들이 예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흥분된 모습으로 앉아있다. 예수는 성서에 왼손을 얹고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있지만, 곧 심판의 날이 올 것처럼 주변은 동요하고 있다.
이렇게 묵시적인 분위기는 당시에 팽배했던 천년왕국설과 관계된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지상에 온 지 천년이 되는 해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세기말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의 삶이 지배받고 있다고 느꼈고, 무섭고 신비한 초월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였고 신자들을 묵상과 참회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었다.
기둥에 새겨진 신비한 동물 사전
로마네스크 조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벽과 기둥의 일부였다. 무아삭 수도원 정문의 <예레미아>[그림 5] 는 건축과 조각이 통일된 전형적인 예이다.조각가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 성인을 표현하기 위해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진 형상을 창조했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는 세기말적 불안함과 초월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오텅 대성당의 거대한 팀파눔에도 그와 비슷하게 길게 늘어난 형상들로 가득하다.[그림 6] 예수조차 그 해부학 구조를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나있다. 예수의 오른쪽 편엔 천국의 옥좌에 앉은 성모와 천국 문을 지키는 베드로와 성인들이 있다. 천사가 그 아래에서 착한 영혼들을 천국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반대편엔 천사와 괴물처럼 생긴 악마가 영혼의 무게를 재고 있다. 악마는 지하에서 영혼을 끌어올려 저울에 얹고, 천사는 영혼을 구하고 싶은 듯 자기 쪽 저울을 살짝 누르고 있다. 천사는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만 기다리는 영혼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이렇게 두려움을 주는 정문을 지나고 들어선 성당은 고요하다. 거기엔 시선을 끌만한 조각과 미술품들이 없다. 그러나 명상과 사색의 공간인 중정中庭으로 나가면 회랑 기둥에 새겨진 다양한 형상들이 시선을 끈다. 어떤 기둥은 성가족의 이집트 도피나 예수를 고발한 유다의 자살과 같은 이야기가 새겨진 성서였다.[그림 7, 8] 또 어떤 성당의 기둥은 독수리와 사자가 결합한 그리퐁, 켄타우로스, 인어 등이 새겨진 ‘신비한 동물 사전’이었다.[그림 9] 이처럼 로마네스크 수도원 회랑엔 실제부터 환상까지 모든 것이 다 있을 것만 같다.
이 보편주의 예술은 백과사전적이다. (…) 창조된 세계가 아니라 천지창조의 전날 밤에 하느님이 꾸신 꿈과 그의 작품의 무시무시한 밑그림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는 곧 현실적 백과사전에 앞선 상상의 백과사전이다. -앙리 포시옹, 『로마네스크와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은 이중적이다. 육중한 건축물과 일정하게 늘어선 기둥과 아치, 그리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정방형 중정은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그곳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 악마와 괴물, 동물과 동물도 인간도 아닌 존재들은 온전히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수도사들과 순례객들은 이렇게 요란한 이미지들이 뒤섞인 고요한 공간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심판과 죽음, 천국과 지옥, 신비와 질서. 그것이 무엇이든 속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선 사색과 명상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