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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윤숙 Mar 20. 2022

보이지 않는 신을 보여주고 초월적인 세계를 느끼게 하라

중세 미술 (2) 바실리카와 비잔틴 양식

미술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사과 꽃병 등을 열심히 보고 그리는 데 한 아이가 뭔가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다.

“뭘 그리고 싶니?”

“신을 그리려고요.”

“신을 본 적이 없잖아.”

“이제 곧 보게 되실 거예요.”

그러더니 아이는 열심히 뭔가를 그려 나갔다.


인터넷에서 한 강연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문득 그 아이가 그린 신의 형상이 궁금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대규모 성당이 지어지면서 미술에 안겨진 숙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보여주고, 초월적인 세계를 느끼게 하라!


미술가들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그리스, 로마가 남긴 예술적 성취들을 참고하고, 황금과 온갖 귀한 재료들로 치장했다. 황제는 성당 건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옛 이름 비잔티움)과 라벤나에 남겨진 비잔틴 양식의 성당들은 화려한 장식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화려함이 비잔틴 예술의 본질은 아니었다. 비잔틴 양식이 구현하려고 것은 신의 형상이자 신성한 정신이었다.      




바실리카, 정치 공간에서 예배당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인으로 지상으로 올라온 기독교가 처음 부딪힌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 논쟁이었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신과 예수는 어떤 사이인가?  지역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공동체들은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인물은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지역의 주교들을 불러 공의회(議會) 개최하는데,  공의회에서 투표로 예수의 신성(神聖)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기독교의 소프트웨어를 안정시킨 황제는 하드웨어 구축에도 힘을 쏟는다.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있는 교회 건축을 주도한 것이다.


그림1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


오랫동안 지하에서 활동해  기독교는 자생적 건축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가정집 내부를 개조한 건물이나  형태의 건축물을 예배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황제가 후원자가 되면서 보다 번듯한 건축 양식이 교회 건축에 도입되었다. 성당 건축에 참고할  있는 양식은 그리스와 로마의 것이었다. 그중 그리스 신전 건축 양식은 성당 건축과 맞지 않았다. 그리스 신전은 신상을 모시는 성소였기에 사람들이 모일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교회 건축의 모델로 선택된 것은 목조 지붕이 얹어진 바실리카(basilica)[그림 1]였다.


그림2   바실리카 평면도



바실리카는 중앙 홀인 신랑(nave)와 좌우 측랑(aisle)을 기본으로 하는 건축물로, 로마에서 재판이나 회의 등에 사용되었다. 기독교는 바실리카의 전면을 동쪽을 향하게 하고, 반원형으로 돌출된 공간인 후진(apse)에 제단을 만들어 교회 건축의 기본으로 삼았다.[그림 2]


그림3 성 베드로 바실리카 복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건설한 교회 중 최고의 건축물은 지금은 사라진 성 베드로 바실리카[그림 3]였을 것이다. 바실리카가 세워진 바티칸 언덕은 네로 황제가 개발하여 원형 경기장을 지었던 땅이었다. 그런데 64년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하고, 그 화살이 기독교인들에게 향하게 되면서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처형된 비극의 공간이 되었다.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이었던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도 이곳이었다. 그렇게 의미 깊은 곳에 세워진 성 베드로 바실리카는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장대한 건축물이었고,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모태가 되었다.  




비잔틴 성당, 모자이크로 구현한 신의 빛


중세 시대 최고의 도시는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동서양을 잇는 교역로이자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온갖 물자와 자본이 그곳으로 흘러들었다. 황실은 상공업을 두루 관장하며 많은 산업을 독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황제는 신의 대사제(大司祭)를 자임하며 종교 지위까지 얻게 된다. 비잔틴 성당은 이렇게 경제력과 정치력, 종교적 지위까지 독점한 황제의 후원으로 세워진 건축물이었다.


그림5  산 비탈레 성당 주제단 뒤 천정 모자이크 (왼쪽부터 : 비탈레 성인, 천사 미카엘, 예수, 천사 가브리엘, 대주교 에클레시오)

비잔틴 성당은 우주와 신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거대한 돔과 반구형 천정은 시작도 끝도 없는 천상의 세계를 상징했다. 예를 들어 산 비탈레 성당의 제작자들은 그곳에 천사를 거느린 예수의 도상을 배치했다.[그림 4] 예수는 오른손으로 순교자 성 비탈리스Vitalis에게 관을 건네고 있다. 한편 예수의 왼쪽에 있는 천사는 팔각형 모양의 성당 모형을 들고 있는 한 남자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산 비탈레 성당을 봉헌하는 대주교 에클레시오이다.


중세 미술에 익숙하지 않거나 도판으로만 만나는 사람들은 천상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밋밋하고 단순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의도된 것이었다. 모자이크로 장식된 세계는 현세의 공간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였다. 인물의 형상 역시 외형이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잔틴 미술은 이를 위해 물질적인 속성인 부피, 무게, 움직임, 색채 등을 제거해나갔다. 그로 인해 산 비탈레 성당의 예수는 공기도 빛도 없는 공간에 중력조차 느낄 수 없는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내고 신비한 정신을 체험하게 한다.  


그림 5 산 비탈레 성단 주제단 벽면 모자이크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
그림 6 산 비탈레 성단 주제단 벽면 모자이크 -  테오도라 황후와 시녀들

천장이 천상의 세계라면 제단을 둘러싼 벽면은 지상의 세계였다. 그곳에는 신하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녀들을 동반한 테오도라 황후를 묘사한 모자이크가 마주 보고 있다.[그림 5, 6] 화려한 관을 쓰고 후광에 둘러싸인 황제와 황후는 각기 미사용 빵이 담긴 성합(聖盒)과, 포도주가 담긴 성작(聖爵)을 들고 있다.


이러한 도상들은 모두 의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의전은 정교하게 짜여진 정치적 퍼포먼스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서열을 한눈에 드러내준다. 이 모자이크들은 예수는 천상 세계의 주인이고 황제와 황후는 지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확인시켜준다. 비잔틴 제국은 이렇듯 정치 선전물로 미술을 활용하는 로마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그림7  산 비탈레 성당 외관, 라벤나, 이탈리아 https://commons.wikimedia.org

그럼에도 산 비탈레 성당은 위대한 종교 예술품이다.[그림 7, 8] 이 성당은 원형에 가까운 팔각 건축물로 외관이 단순하고 소박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는 크지 않은 창문으로 빛이 흘러드는 어두운 공간이다. 하지만 서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하게 되면 찬연하게 빛을 발하는 모자이크가 눈에 들어오고, 관람자는 자신이 어느새 신비한 빛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와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림8  산 비탈레 성당 내부 http://www.avrvm.eu/the-basilica-of-san-vitale-ravenna/


모자이크에서 반짝이는 빛은 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상징한다. 신을 빛으로 상징하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의 발상이었다. 플로티누스는 만물을 창조하는 빛을 발산하는 일자(一者)라고 신을 규정했고, 기독교는 이런 사상을 흡수했다.


이렇듯 비잔틴 성당은 기독교만의 창작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경제력과 정치력을 거머쥔 로마 황제와 그리스 철학을 만나 이룩한 우주였다. 그곳은 모든 것이 가장 또렷하게 보일 것 같은 햇빛 찬연한 날에 가시적인 세계 너머, 신의 정신으로 이끄는 초월적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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