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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카카 May 18. 2024

8살의 꽃망울 터지는 로맨스

 겁이 많던 첫째는 네발자전거를 고집하다 8살이 되어서야 두 발자전거에 도전하게 됐다.

큰마음을 먹고 공터로 나가 연습해 보기로 했다. 운동신경이 없는 아이라 각오를 했음에도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드라마에서 처럼 아이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며 눈물 찡하게 성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꿈꿨건만, 현실은 달랐다.


"엄마가 잘 안 잡아서 넘어지잖아!!"

"잘 잡아야지!! 이게 뭐야! 안 해 안 해!!"

"자전거는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알고 있는 온갖 짜증의 말을 쏟아내는 아이를 보며 화가 치밀었다. 허리도 못 펴고 땡볕에 질질 끌려다니는 엄마에게 그게 할 소리니!

씩씩 거리던 나를 보며 남편이 의기양양하게 도전한다. '내가 하면 저렇게 안 하지. 잘 봐둬라.' 자신만만하던 남편은 5분 만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돌아온다. 평소에 말랑하고 얌전한 딸은 공터에는 남 탓을 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은 남의 자식 일이어야 하는데.. 불같이 화내고 있는 건 안타깝게도 내 자식이다.


자존심이 상한 아이는 한동안 자전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놀이터는 자전거 타는 친구들로 가득했다. 절대 안 탈 거라고 소리를 지르던 딸은 언젠가 자전거를 1층으로 내려달라고 했다. 지켜보기만 하지 절대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였다. 나는 벤치에 묶인 채 자전거와 함께 휘청휘청 비틀비틀 대는 딸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건만 딸은 페달을 돌리지도 못했다. 땅에 디딘 발을 떼고 페달을 밟아야 했는데 그 한 번을 어려워했다. 그 덕에 넘어질 일도 없었지만 타고 나아가는 일 또한 없었다.




옆동 사는 남자아이는 운동신경이 좋아 유난히 달리기를 잘했다. 축구공 농구공 탱탱볼 못 다루는 공이 없었고, 줄넘기를 손에 쥐면 벌새처럼 쌩쌩이를 돌리곤 했다. 놀이터에서도 아이는 달랐다. 평범한 계단은 시시했는지 벽면을 클라이밍 하듯 올라 선채로 미끄럼틀을 달려 내려오곤 했다.

멀쩡한 길을 놔두고 장미덤불을 기어들어가 울타리를 건너 다니거나 이도저도 할 게 없으면 '뒤'로 걸어 다녔다.

도깨비풀을 옷에 잔뜩 붙이고 뛰어다니는 들짐승 같은 아이를 엄마는 기겁하며 잡으러 다녔다. 아이는 잽쌌지만 엄마는 더 빨랐다. 엄마는 호랑이처럼 순식간에 아이 뒷덜미를 잡아들었다. 운동신경은 엄마를 닮은 건가. 앉아서 소꿉놀이나 하는 딸엄마들은  모자를 신기하듯 바라보았다.




안장에 앉아 걷고있는 어정쩡한 딸 주변을 남자아이는 슬렁슬렁 맴돌았다. 흘깃 몇 번을 쳐다보던 아이는 자전거에 올라 보란 듯이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도 했다. 분수대에서 놀이터까지는 아파트 한 층 정도 높이차가 있다. 걷기도 버거운 그 길을 거침없이 다니는 걸 보고는 딸아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벤치로 돌아온다.


"잘난 척하지 말라지."  딸은 내 옆에 앉아 투털 댔다.


아무 말하지 말라는 주문을 받은 나는 칭찬도 조언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닫고 앉아 분수대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타는 남자아이를 바라만 본다. 바퀴넓이만 한 길에서 용케도 중심을 잡던 아이는 곧이어 앞바퀴를 들고 얕은 계단까지 자전거로 오르내린다.

한참을 묘기를 부리던 아이는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쭈뼛거리며 딸에게 다가왔다.


"왜?"

아이는 다짜고짜 묻는다.

"왜??"

되묻는 딸에게 아이는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는데?"

돌림노래 같은 왜 타령 뒤에 마지못해 딸이 대답한다.


"넘어질까 봐 무서워."


머뭇거리던 딸아이의 대답에 아이는 한순간 표정이 환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이는 다짜고짜 자전거에 올라 놀이터까지 잽싸게 달린다. 제일 높은 곳까지 힘차게 오르던 아이는 그 끝에서 잠시 멈춘다. 잘 지켜보라는 듯 숨을 크게 쉬고는 고개를 까닥한다.  지는 해를 등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그 덕에 아이 주변으로 후광이 비친다.

곧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잠시 후. 아이는 무서운 속도로 경사로를 내려오기 시작한다. 쎄에엥. 뒤집히도록 빠른 속도로 내려오던 아이는 끼익 딸 앞에서 자전거를 내버리듯 뛰어내리며 넘어진다.


놀란 우리에게 아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툭툭 바지를 털며 다가온다. 평온한 표정과 달리 무릎에서는 진득한 피가 배어 나온다.


"봤지? 넘어져도 안 아파.."

눈을 반짝이던 아이가 말을 잇는다.

 "봐. 이제 안무섭지?"


배시시 웃는 딸아이를 향해 아이는 이를 보이며 싱긋 웃는다.


마주 본 두 아이가 처음으로 함께 웃는다.



비루한 벤치에서 8살의 로맨스를 직관한 내 입꼬리는 광대까지 올라간다. 팡팡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내 옆에서 무뚝뚝한 아들의 무릎과 미소를 번갈아 보던 아들엄마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내일 간까지 내줄 수도 있으니 받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고 엄마는 아들의 뒷덜미를 잡고 집으로 끌고 간다. 펑 엄마 가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넘어져도 별거 아니라는 시범까지 본 딸은 용기가 생겼다. 몇 초간 땅에서 발을 떼더니 며칠뒤에는 페달을 굴릴 수 있게 됐다.

아이 덕분에 딸은 그 무섭던 한 번을 이겨냈다.


다정하지는 못했던 남자아이는 딸의 자전거 성공을 축하해 준다거나 응원해 주진 않았다. 그저 보안관 마냥 자전거로 아파트 단지를 돌고 또 돌며 마을을 지킬 뿐.


이 소동의 끝. 감동한 건 딸이 아닌 나였다.

"괜찮아" 같은 응원의 말은 아니었지만 아이만의 투박한 위로가 내 마음을 녹였다.

그리고 딸의 무서움을 이겨내게 해 준 아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딸아이 주변을 몇 번이고 돌던 아이는 어느 해지는 저녁.  땀방울이 잔뜩 맺힌 채 딸에게 물었다.


"번호가 뭐야?"


불러주는 번호를 받아 누르던 아이는 여러 번 버벅거리더니 쥐고 있던 핸드폰을 건넨다. 핸드폰을 받아 든 딸이 숫자를 입력하는 동안 남자아이는 뒤 돌아 애꿎은 울타리를 텅텅 차고있다.


잘은 모르지만 까만 몽돌 같았던 아이에게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말재주가 모두 발재간으로 간 아이가 전화를 한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싶지만 나는 다음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으로 통화여부를 묻곤 했다.


처음 보는 아이들의 로맨스에 신나 버린 건 엄마들이었다. 핑크빛 필터를 끼고 드라마 보듯 흥미롭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안녕" 인사하고는 답인사를 듣지도 않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는 도둑인사이야기,

발레 학원가는 딸에게 "예쁘지?" 칭찬하니 입 꾹 닫고 있다가 집에 와서야 고개를 끄덕였다는 뒷북이야기까지.

주책맞은 아줌마들은 만날 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를 추가하며 잇몸이 마르게 웃어댔다.


아이는 자기 전에 가끔 딸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나는 말을 하긴 하냐고 물으며 웃었고, 아들엄마는 엄마가 이쁘냐 ㅇㅇ이가 이쁘냐 질투하며 물었다며 웃었다.




목소리가 있는 건가 싶던 말수 없던 아이는 4년간의 지방생활을 마치고 이사 가던 아이에게

"잘 가"  문자 한 통을 남겼다. 참으로 아이다운 마지막 인사였다.


꽃피는 봄이 오니 그때의 밤송이 같았던 아들이 생각난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준 내 마음속 첫째 사위(?)에게 안부를 물으며. 글을 마친다.


잘 지내지?

너희들의 봄날은 아줌마가 오래오래 기억할게!



이제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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